근대 무기가 개발되기 전에는 활과 칼이 주 무기였다. 칼은 근접전에서 요긴하게 사용되었고, 활은 원거리 저격용으로서 절대적이었다. 우리 민족의 활은 각궁이라 불리는 작은 활인데 탄력과 그 살상면에서 몽골이나 일본이나 중국의 활보다 뛰어난 것이었다고 한다. 각궁은 대나무에 물소뿔을 덧대어 탄력을 극대화하였다. 대나무는 불에 구워 곡을 잡았다. 물소뿔은 휘어진 곡을 반대로 구부려 대나무에 부레풀을 발라 부착하여 활을 만들었다. 거기에 유연함과 강함이 어우러져 멋진 활이 만들어졌다. 검은 쇠를 풀무에 달군 다음 두들겨서 만든다. 달구고 두들겨서 불순물을 제거하고 강하고 단단한 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담금질이라 하여 불에 달군 다음 물에 식혀서 그 칼의 최적합 탄성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갈아서 날을 벼른다. 부러지지 않는 더 날카로운 칼을 위하여 장인의 땀은 흐르고 흘렀다. 다마스커스 검은 시리아의 명검이다. 십자군 전쟁 당시에 기사들의 검과 갑옷을 단칼에 잘라버리고 돌까지 벨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칼을 만드는 기법에는 여러 가설이 있다. 다마스커스 검의 특징은 표면에 독특한 무늬가 있다는 것이다. 새겨 넣은 문양이 아니라 철강 자체가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칼이 만들어질까? 강철과 연철을 겹쳐서 달구고 두들겨서 길어지고 납작해지면 다시 접고 또 달궈서 두들기고, 그렇게 반복하고 반복해서 기이하고 다양한 문양이 담긴 명검이 만들어진다. 강함과 약함, 경직과 유연, 높음과 낮음이 어우러져 다 나음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강해지려고 하면서 부드러워지려고도 하는가? 쟁취하려 하면서 비우려고도 하는가? 높아지려 하면서 낮아짐의 고민을 하는가? 예수님의 제자 바울은 약함을 자랑하였다. 박해를 기뻐하였다. 그 이유는 약할 때 곧 강함이라는 진리인데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기독교 신앙인의 삶은 자기를 과시하는 것이 아니다. 증명하는 것이다. 업적이 아닌 존재다.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는 낮음과 비움과 희생을 기뻐하는 것이다. 자기의 옳음을 강변하다 보면 비판하게 되고, 공격적이며 다투게 된다. 예수님은 왕이 되려 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생명의 메시야가 되셨다. 오늘 왕이 되려 하는 자는 많으나 십자가에 죽으려는 신앙인은 드물다. 오늘도 나는 가지려 하는가? 오늘도 나는 과시하려 하는가? 오늘도 나는 높아지려 하는가? 오늘도 나는 지배하려 하는가? 아니다. 버리려 한다. 아니다. 감추려 한다. 아니다. 낮아지려 한다. 아니다. 섬기려 한다. 존재 증명의 질문에 어떠한 답을 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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