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가 주일날(일요일) 교회에서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사역이 바로 주일 설교이다. 이 설교 한 편을 위해서 설교자는 마치 산모가 해산의 수고를 하듯 성경의 본문을 정하고 그 본문의 역사적·문화적 특징들과 문학의 구조 등을 파악하고 앞뒤 문맥 등을 살피는 고도의 집중력을 동원하여 저자의 의도와 그 내용에 대한 주제와 결론 등을 정해놓고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를 연구하고 기도하며 설교원고를 작성한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수정하고 재 수정하여 최종 점검 후에 연습도 해야 한다. 설교학 시간에 배운 내용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설교자는 꼭 이렇게 집중해서 설교문을 자신이 연구하고 주해하여 논리정연하게 성경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의도에 맞게 작성해야 한다. 혹 자신은 설교문을 보지 않아도 잘 할 수 있는 언어구사력을 갖고 있기에 간단한 메모 정도로 해서 그때그때 순발력을 동원하여 임기응변과 번뜩이는 재치로 설교를 잘할 수 있기에 설교문을 굳이 작성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설교자라도 청중들에게 호소력 있고 감동을 전달하여 변화를 주기를 원한다면 설교자는 반드시 설교문을 작성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말로만 설교했을 경우 탁월한 언변가일지라도 설교문을 작성하지 않으면 결국 똑같은 패턴에서 비슷한 언어를 자기 모르게 사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중에는 다양한 주제로 설교를 해도 결국 언제나 한결같은 주제로 끝난다는 웃지못할 진실이 생기고 만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일상생활에서 자신이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글로 남긴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하며 그것이 자신뿐만 아니라 함께 하는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게 하며 변화를 주며 감동을 주고 무엇보다 자신 안에 있는 지혜와 지성과 이성의 감성 등을 자극하여 삶에 새로운 활력을 주며 보다 의미 있고 값있는 삶을 살도록 이끌어 준다고 보여준다. 필자는 이 영화를 보면서 정말 시인이 되고 싶었고 생각하고 느낀 부분을 열심히 글로 남겼다.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어쩌면 짧으면서도 감동을 줄 수 있는 운문인 시가 사람들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고치는 새로운 치료법으로도 많이 소개되곤 한다. 사람들이 삶에 지치고 힘들고 소망과 사랑이 식어져서 무기력해 진다면 구약성경의 시가서인 “욥기, 시편, 잠언, 전도, 아가서”를 읽으라고 성서학자들이 권면한다. 그러면 참된 위로를 얻으며, 용기가 생기며, 지혜가 만들어지며, 세상 이치를 알게 되며, 사랑으로 가득 채워지는 놀라움에 나 자신의 변화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시인의 경지에 이른 과학자’상이라는 게 있다. 과학 분야에서 탁월한 글 솜씨를 발휘한 저자에게 주는 상이다. 1993년 미국 록펠러대학이 제정했다. 역대 수상자 중에 노벨상 수상자가 네 명이나 됐다. 아인슈타인도 글을 잘 썼다. 우연이 아니다. 생각을 체계적·합리적·논리적으로 펼치는 것은 무엇을 하든 필수다. 미국 의대 시험에서도 에세이를 중시하는 이유다. 그리스·로마시대부터 서구 고등교육의 근간은 수사학(修辭學)이다. 글로든 말로든 생각을 조리 있게 표현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미국 방송을 보면 길 가는 아무한테나 마이크를 들이대도 자기 생각을 풍부하고 논리적으로 얘기한다. 우리는 그저 “너무, 너무” “… 같아요”만 연발한다. 앞뒤가 뒤죽박죽이어서 글로 옮겨 놓으면 무슨 얘기인지 알 수도 없다. 때론 한국어를 배운 지 3~4년 된 외국인이 우리보다 더 조리 있게 한국말을 하기도 한다. 우리도 예부터 글을 잘 쓰고 논리적으로 말하는 걸 강조했다. 이런 전통은 사라진 지 오래다. 해외에서 아이를 키우다 한국에 들어온 사람 불만 중 상당 부분이 글쓰기 교육이 없다는 것이다. 객관식 문제 한두 개 맞히는 데 목숨 거는 세상에선 글쓰기 교육 하자고 말하는 사람이 이상해진다. 올해 초 서울대 자연과학대학 신입생 글쓰기 평가를 했더니 39%가 70점 미만을 받았다. 주제를 벗어난 데다 비문(非文)에 맞춤법도 엉망이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20년간 글쓰기 프로그램을 운영한 낸시 소머스 교수는 “어느 분야에서든 진정한 프로가 되려면 글쓰기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짧은 글이라도 매일 쓰라. 그래야 비로소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하버드 대학 신입생은 한 학기 적어도 세 편 에세이를 쓴다. 교수가 일일이 첨삭 지도한다. 사회에서 리더가 된 졸업생에게 ‘성공 요인이 뭐냐’고 물었더니 가장 많은 답이 ‘글쓰기’였다. ‘능력을 하나만 가질 수 있다면?’이란 질문에 대한 답도 단연 ‘글쓰기’였다. 글쓰기는 기술이 아니다. 생각의 근력(筋力)을 키우는 일이다. 생각하는 힘이 없는 사회는 주관 없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냄비 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불필요한 갈등도 빈발한다. 읽지도 않고 쓰지도 않는 우리 모습 아닌가. (조선일보, 만물상 2107.6.7.), 안석배 논설위원. 글을 쓰면 나의 복잡한 생각들이 어느 덧 정리가 되고 셋팅이 된다. 그리고 놀랍게도 들뜨고 혼잡한 마음이 정리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무엇보다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제 보고 읽는 것에 익수한 우리들이지만 이제 글을 써보자. 그냥 간단하면서도 진솔한 우리들의 마음을 시로든 잠언이든 또는 산문이든 글을 쓰자.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웃들과 함께 나누자. 지금도 연애 중에 나에게 쓴 아내의 짧은 쪽지의 글이 내 가슴 깊이 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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