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호국보훈의 달이다. 수천 년 역사 속에서 엄청난 외침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지켜낸 한민족. 함양에도 왜적에 맞서 우리 강산을 지켜내기 위해 몸을 던진 수많은 이들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637년 전인 1380년, 고령 우왕 당시 쳐들어온 왜구에 맞서 싸운 500영령들, 그리고 200년의 시차를 두고 1597년 다시 한 번 왜구에 맞서 싸운 황석산성 전투. 사근산성 전투 이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크게 부각되었으며, 황석산성 전투를 통해 정유재란의 끝을 치달을 수 있었다.사근산성(沙斤山城)은? 함양은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로서 크고 작은 전투들이 빈발했던 곳이며,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가는 길목이라는 전략적 요충지로 곳곳에 산성을 쌓아 전략적인 방어기지 역할을 수행했다. 함양에는 수많은 산성들이 곳곳에 포진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사근산성과 황석산성, 육십령고성, 방지성, 팔령산성, 박회, 마안산성 등이 있다. 그 중에서 사근산성은 바로 아래 사근역과 함께 지역 방어의 중심지이자 교통의 중심 역할을 수행했다. 신동국여지승람(新東國輿地勝覽)의 기록을 살펴보면 함양에서 왜적을 맞서 싸운 최초의 기록이 바로 사근산성(沙斤山城) 전투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사근산성은 군의 동쪽 17리 지점 사근역(沙斤驛) 북쪽에 있으며 둘레가 2,796척, 높이가 9척이고 성안에 못이 세 군데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도 연화산 꼭대기 사근산성 정상을 오르면 저 멀리 지리산과 덕유산은 물론이고 산청과 거창 등 인근의 지리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정도로 사방이 확 트인다. 그 만큼 전략적 요충지로서 항시 수백의 군사들이 이곳에 주둔했을 정도다. 참혹했던 사근산성 전투예로부터 왜구의 잦은 침입을 받아온 우리나라. 왜구가 기승을 부릴 때는 내륙까지 그 영역이 확대되기도 했다. 1379년(고려 우왕5) 5월, 약 3000여 왜구가 조선에 상륙해 진주를 침범했으며, 이듬해 1380년 8월에는 진포(현재 군산)에 상륙한 왜장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이끄는 왜병3000명이 삼남지방을 철저히 유린하고 경북 상주(尙州)를 짓밟은 후 다시 호남지방으로 진출하기 위해 함양을 지나쳤다. 이 첩보를 전해들은 고려 조정에서는 삼도원수(三道元帥) 배극렴(裵克廉)을 비롯해 박수경(朴數敬), 배언(裵彦), 도흥(都興), 정지(鄭地), 김용휘(金用揮), 지용기(地用奇), 배언하(裵彦何), 을지(乙支) 장군 등 9명의 장수와 500여명의 군사로 이를 막게 했다. 왜구들이 호남지방으로 진출할 경우 엄청난 피해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배극렴 장유리한 성에서 나와 수성이 아닌 야지 전투를 택해야만 했던 이유다. 3000대 500의 대 혈투, 전투에서 박수경(朴數敬) 장군과 배언(裵彦) 장군, 함양 감무(군수) 장군철(張群哲) 등 3명의 장군이 전사하고 500여명의 고려 병사들마저 전멸하고 만다. 전투 이후 성에서 흐르는 물이 피로 얼룩져 계곡은 혈계(血溪)를 이루었으므로 지금도 죽산천을 ‘피내’ 혹은 ‘혈계’라고 부를 정도다. 참혹했던 전투의 기억 뇌계(㵢溪) 유호인(兪好仁) 선생은 그의 시 ‘사근산성’을 통해 참혹했던 전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근산성 가에 검은 구름이 일어나니(沙斤城畔起陰雲) 땅의 혼령은 밤에 울고 비는 분분하도다(坤靈夜泣雨紛紛) 경신년의 많은 귀신 두런두런 우나니(庚申萬鬼啾啾哭) 그때의 장사군(將事君) 한인 듯 하네(似恨當時將事君)또 조선 초기의 문장가인 쌍매당(雙梅堂) 이첨(李詹)도 호국영령들이 스러져 간 사근산성 전투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운봉산(雲峰山) 밑 가을바람 일찍구나(峰山下秋風早)날은 맑고 하늘 차며 나뭇잎 시들었네(日淡天寒木葉稿)분하다! 섬 오랑캐 우리 군사 무찔러(是時島夷敗我軍)붉은 피가 함양의 언덕 풀을 적셨네(血濺咸陽原上草)·······사근산성 전투는 패배한 전투다. 역사는 패장지성(敗將之城)에 대해 철저하게 감추려한다. 수백의 고혼이 묻힌 사근산성은 전투 이후 폐허가 되었으나 조선 성종 때 전략적 가치가 인정되어 수축했다. 그 이후에도 오랜 시간 방치되다 지난 1966년 9월 8일 정부에서 사적 제152호로 지정해 보존되고 있다. 사적으로 지정되었지만 이렇다 할 정비조차 이뤄지지 않았었다. 산성은 허물어지고 발굴조사도 이뤄지지 않아 지역민들은 사근산성의 역사성 보다는 연화산이라는 등산로 정도로만 인식될 뿐이었다. 이것을 바꾼 것이 성경천 위원장이다. 사근산성의 현재와 미래연화산은 수동면민과 함양군민들에게 인기 있는 등반 코스다. 약 4km 등산로는 그렇게 급하지도 않고 쉬엄쉬엄 올라도 2시간 내에 둘러볼 수 있을 정도다. 그 옛날 선조들이 피 흘렸던 역사의 현장이 이제는 등산로가 되어 일반인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게 됐다. 사근산성에 대한 역사적인 조명은 관이 아닌 민간에서 먼저 이뤄졌다. 현재 사근산성 순국선열추모위원회를 이끌고 있는 성경천 위원이 1997년 수동 연화산악회 회원들과 함께 산을 오르다 옛 기억을 되짚으며 옛 샘터를 발굴하면서부터다. 산악회 회원들이 풀을 베고 돌을 들어내면서 살펴본 샘터는 인공적으로 물을 끌어들일 수 있는 선조들의 지혜가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이후 산악회 회원들과 몇몇 뜻있는 지역민들을 중심으로 사근산성에 대한 역사적 고찰과 발굴 등을 끊임없이 요청한 끝에 정부의 지원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최근 대략적인 성벽 보수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그 옛날 웅장했던 성곽이 제 모습을 갖췄다. 사근산성 복원은 2012년부터 약 7억 5000만원의 사업비로 성곽보수, 탐방로 개설, 성문지 발굴조사 등이 이뤄졌다. 그 동안 띄엄띄엄 옛 성곽의 모습만 보여 지던 성곽인 높이 5m 이상의 웅장한 석벽으로 높이 서게 됐다. 아직까지는 옛 성문이나 여러 시설들이 갖춰지지는 않았지만 우선 성곽의 복원을 통해 그 옛날의 모습을 조금은 느낄 수 있게 됐다. 가장 중요한 것은 추모사당의 건립이다. 성경천 위원장을 비롯한 지역사회가 합심해 지난 2013년 모두 21억5000만원의 사업비를 확보했다. 그러나 예산은 확보했으나 부지의 선정을 못하고 있던 중 나주임씨 남계공파 종중에서 약 8,459㎡(2500여평)을 기증받을 수 있었다. 이후 3년간의 공사 끝에 수동면 원평리 산53-1번지 4985㎡면적에 추모사당을 건립했다. 사당을 비롯해 삼문·제기고·협문·의총 등 사당공간과 부대시설, 진입도로 등을 갖출 수 있게 됐다.지난 2015년 10월 12일 600여명의 추모객들이 모인 가운데 추모사당 제막식을 갖고 순의 635주기 사근산성추모제를 개최했었다. <인터뷰> 성경천 사근산성 순국선열추모위원회 위원장 사근산성, 호국의 산 교육장으로 만들어야“우리에게 이런 아픈 역사가 있는데 그것을 잘 보존해 후손들에게 전해주어야 한다. 역사가 있어야만 현재가 있는 것이다.”초여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5월29일 오전, 사근산성 순국선열추모위원회 성경천 위원장과 함께 연화산을 오르며 그가 한 말이다. 그는 지난 십여 년을 사근산성의 역사적 조명과 복원이라는 대명제를 위해 온몸을 바쳤다. 사근산성을 찾는 길은 추모사당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차량을 이용하니 성벽까지는 체 10분도 걸리지 않는 짧은 길이었다. 성경천 위원장과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연화산악회에서 발굴을 시도했던 샘터다. “이 곳에 사근산성이 있었던 것이 1000년이 넘었다. 참혹했던 상흔은 구전으로 내려만 왔지 지역민들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을 정도다. 옛 문헌을 보니 참혹했던 전쟁의 현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우리의 아픈 역사를 그렇게 묻혀서는 안 된다는 사명감으로 산악회 회원들과 함께 물과 흙을 퍼내며 발굴을 시도했다. “옛날에 군사들이 주둔을 하면서 이곳에서 물을 먹고 사용했다. 양수기를 가져와 물을 퍼냈는데 함양군에서 사학자들이 와서 연구를 해야 한다며 중지를 요청했다.” 그들의 발굴은 중단됐지만 사근산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멈추지 않았다. 이후 그는 사근산성에서 죽어간 넋을 위로할 수 있는 방안 마련을 위해 고심하다 추모위원회를 조직하고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올해 79살인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제(祭)를 지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산을 늘 오르내리며 가슴 아픈 역사가 있는데 왜 제 조차도 지내지 못했는지...그 동안 잊고 있었다. 운봉에는 이성계 장군이 승전을 했다고 해서 별천지를 만들어 놓았다. 여기는 패장성이라는 이유 하나로 역사 속에 묻혀 있었다.” 그도 충분하게 패장지성으로 역사적으로 숨겨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500여 영령들을 위로할 수 있는 길은 제를 지내고 그분들이 그렇게 지키려 했던 성의 복원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마음은 더욱 굳건해졌다. 위원회를 꾸리고 수동 향우들을 만나기 위해 전국으로 뛰었다. 그렇게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길 4년, 마침내 사근산성 순국선열들의 넋을 달래는 추모제가 처음으로 열리게 됐다. 어느 정도의 복원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성의 윤곽이 드러났다. 사근산성은 수십m 낭떠러지부터 5m 가량의 높이까지 과히 난공불락의 옛 모습 그대로의 요새로 바뀌었다. “지금부터 한 10년 전부터 복원이 시작되었다. 아직까지 더 해야 한다. 허물어진 곳도 있는데 꼭 필요한 부분만 한 것 같다. 과거의 성과 모든 것을 똑같이 복원하고 있다.” 보수한 곳은 옛 성벽 위에 옛 모습 그대로 쌓아 올렸다. 천년의 성벽 위에 새로운 천년의 성벽이 놓였다. 어느 정도 복원이 마무리되었지만 아쉬운 부분도 많다. “우리의 욕심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지만 여기에 병사들이 주둔했던 숙영지도 만들어야 하고, 군인들이 어떻게 생활했는지 그런 모습도 재현해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의 장이 될 수 있도록 만들었으면 한다.” 이제 어느 정도 복원이 마무리 된 사근산성. 성경천 위원장이 바라는 역사의 현장 사근산성은 겉모습만이 아닌 군민들의 가슴에 영원히 남을 호국 애민 정신이 깃드는 것이었다.그렇게 사근산성을 둘러본 후 3년 전 완공된 추모사당으로 향했다. “장수 9분 모두 모셨다. 당시 전사하신 장수는 3분이지만 9분을 모셔도 되는지 성균관에 문의하니 모두 모셔도 된다고 했다. 매년 음력 8월 말일에 제를 지내고 있다. 제를 처음 지낼 때는 유족분들이 한분도 안 오셨는데 그 이듬해 배언 장군의 후손이, 그 이듬해에는 도흥 장군의 후손이, 올해는 오언하 장군의 후손이 찾을 예정이다. 해가 거듭될수록 유족들이 찾아와 선조들의 위패를 모신 곳을 보고 간다. 함양을 알리는데도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추모사당 곳곳에는 그가 고심한 흔적이 남아있다. 특히 함양을 대표하는 허영자 시인이 직접 쓴 추모시도 한곳에 마련되어 있다. “우리의 이런 아픈 역사를 후손들에게 잘 전해주어야 한다. 역사가 있어야만 현재가 있는 것이다. 추진위원회와 행정, 지역사회가 합심해 사당도 짓고, 성도 복원하고 오늘에 이른 것 같다.” 아직도 일주일에 2번 이상을 사근산성 산행을 하는 성경천 위원장. 그는 그 곳에서 만나는 산행객들에게 사근산성의 아픈 역사를 설명하고 그들의 마음속에 역사를 심어주는 역할을 한다.강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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