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역사 사극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는 도대체 어떤 드라마인가? ‘육룡이 나르샤’는 세종대왕 27년(1445년)에 만들어진 악장 ‘용비어천가’ 1장 첫 구절에 나오는 말이다. ‘해동, 육룡이 나르샤 일마다 천복이시니-’에서 따온 말로 ‘우리나라에 여섯 용이 날아서 하는 일마다 하늘의 복을 받는다.’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여섯 용은 청룡 흑룡 황룡같이 어떤 용을 말하는 것일까? 용비어천가에서의 의미는 세종대왕 전 6명의 선조 왕 목조-익조-도조-환조-태조-태종을 지칭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조선을 세운 여섯 사람을 말한다. 태조 이성계, 삼봉 정도전, 태종 이방원과 가상인물 3명을 지칭하고 있다. 결국 이성계 정도전 이방원 3인이 대립하며 세워나가는 조선의 건국 이야기다. 물론 조선은 태조 이성계가 세운 나라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삼봉 정도전이 꿈꾼 나라였다. 급진 신진 사대부 정도전은 조선을 유교를 바탕으로 한 신권(臣權)의 나라로 만들고 싶었다. 신권정치라 함은 왕이 다스리는 왕도정치가 아니라 신하들이 즉 똑똑한 재상들이 나라를 운영해 나가는 재상중심 정치체제를 꿈꿨다. 정도전이 쓴 불교를 비판한 ‘불씨잡변’과 나라의 틀을 세운 ‘조선경국전’이 그가 꿈 꾼 나라의 설계도였다. 포은 정몽주는 고려왕조를 유지하면서 점진적인 개혁을 해 나가자는 온건 개혁을 주장했고 정도전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역성혁명을 주장하는 급진 개혁파였다. 이 대립을 태종 이방원이 이 둘을 차례차례 제거함으로서 조선건국의 난제가 해결된다. 이방원이 정몽주에게 잘 알려진 시 ‘하여가’를 주고 정몽주는 시 ‘단심가’로 답한다.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이 둘을 새 버전으로 잘 묘사해 놓았다. 옮겨 본다. 방원: 도저히 이 나라, 포기가 안 되십니까? 포은: 내가 나고 자란 나라다. 나와 내 가족과 내 동문들을 길러낸 이 땅을, 이 사직을 등진다면 어찌 유자(孺子)라 할 수 있겠는가. 방원: 사직. 사직이라… 백성들은 말입니다. 실은 사직이 어찌되든 연연치 않더이다. 포은: 하여 그 가엾은 백성이 새 나라를 원하기라도 한다는 것이냐? 방원: 백성들에겐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포은 선생께서 사직을 지키든 삼봉 스승님께서 건국을 하든 그들에겐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백성에겐 오직 밥과 사는 기쁨, 이거면 되는 것이지요. 포은: 네 놈은 또 백성을 팔아먹고 있는 것이야. 방원: 저 만수산에 칡넝쿨이 저리 얽혀 있다 한들 그것을 탓하는 이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포은 선생과 삼봉 스승님 두 분이 저리 얽혀 손을 맞잡고 백성들에게 생생지락(生生之樂)을 느끼게 해준다면, 선생께서 그리 중시하는 그 역사를 누가 감히 하찮은 붓끝으로 선생을 욕보일 수 있단 말입니까. 포은: 백성이라, 생생지락이라. 잘 듣게나. 유자는 백성을 쫓는 것이 아니네. 백성을 품고 오직 이끌어야 하는 것이야. 품기 위하여 사직이 필요한 것이고, 그를 향한 유자의 마음을 충이라 부른다네. 그 충을 버리면 마음 안의 백성도 사라지는 것이야. 방원: 우리는 어떻게 해도 선생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까. 포은: 참으로 하찮은 겁박이로다! 이보게, 이성계 장군과 삼봉 자네들이 어찌한다 해도 단지 얻을 수 있는 건 고려와 백근 조금 넘는 이 몸뚱아리 뿐이네.나를 죽이고 죽여 일백번을 죽여 보시게. 백골이 다 썩어나가고 몸뚱아리가 흙이 되어 먼지가 된다 한들, 이 몸 안에 있었던 한 조각 충을 향한 붉은 마음은 일편단심 가지지 못할 것이네. 아, 자네가 가질 것이 하나 있긴 하네. 천년의 악명. 자네는 이 정몽주라는 이름과 내일 아침부터 천년동안 얽혀 기록되고 회자될 것이야. 잘 감내해 보시게! ‘삼봉, 자네 말대로 됐군. 고려의 천년대계를 위해 이 목숨을 바치려 했건만, 이 나라는 끝이 나고 내가 천년을 살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란 말인가.’-정도전은 왕궁을 개성에서 한양(서울)으로 옮길 것을 건의했다. 무학대사는 계룡산 일대를 추천했고 정도전은 서울 한양을 건의했다. “한양은 남쪽과 북쪽 중간에 위치해서 나라 다스리기가 좋습니다. 또 한강이 있어서 중국과 교역이 쉽고 세금을 배로 실어 나르기가 편하고 또 서울은 좌청룡 우백호로 동은 낙산, 서는 인왕산, 남은 남산, 북은 북악산이 둘러싸고 있어 최강의 요새 명당입니다.” 정도전은 유교의 골격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 따라 동대문을 흥인(仁)지문, 서대문을 돈의(義)문, 남대문을 숭례(禮)문, 북대문을 숙정문, 중앙에 경복궁과 보신(信)각을 지었다. 정도전은 또한 왕이 사는 궁궐 경복궁을 짓고 업무 보는 근정전을 짓고 궁궐 왼쪽에는 선조의 위패를 모시는 종묘를 오른쪽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을 세워 조선 건국의 틀을 완성하였다. 경복궁이라 함은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두 자를 따서 경복궁이라고 지었다. 근정전이라 이름 한 것은 ‘왕도 마땅히 부지런한 것을 부지런히 정치를 해야 한다.’는 정도전의 깊은 뜻이 숨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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