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가는 육십령의 길목에 위치한 황석산성. 지리적 요충지의 황석산성은 7년 전쟁으로 불리는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민초들이 숨져간 역사의 아픈 현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의(義)와 충(忠)의 고장 함양에서 민과 관이 합심해서 이룩했던 황석산성 전투는 관련 사학자나 해당 지역민이 아니고서는 잘 알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황석산성 전투는 제대로 기록되어지지 않은 전투로 남아있다. 정사에서는 수백의 관군만이 싸웠다고 전하지만 야사에는 7천의 민관이 7만의 왜구를 맞아 수일 동안 임전했다고 전한다.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황석산성 전투와 비슷한 남원전투나 성웅 이순신이 활약한 명량해전에 비해서는 너무나도 초라한 모습이다. 황석산성에서 숨져간 이들은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검증되지 않은 역사의 파편으로만 남아있다. 이번 기획취재를 통해 함양군민만이라도 황석산성 전투와 그 속에서 숨져간 이들을 기렸으면 한다. <편집자 주>1. 정유재란과 황석산성 전투의 시작 2. 민초들의 이뤄낸 황석산성 전투 3. 남원산성 전투와 만인의총4. 7만 민관군 처절했던 진주성전투5. 황석산성 전투 역사의 전면에 서야2. 민초들이 이뤄낸 황석산성 전투지난 8월31일 오전 역사의 현장 황석산성 등산을 시작했다. 그동안 문헌과 귀동냥으로만 알고 있던 황석산성. 함양의 우국충정이 그대로 녹아있는 황석산성을 오르며 무언가 가슴속 찡한 울림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피바위를 마주했을 때는 처절했던 우리 선조들의 아픔이 느껴졌으며, 중턱의 산성을 바라보며 선조들의 결의가 느껴지는 듯 했다. 1197m 황석산 정상에 오르면 백두대간의 장쾌함과 함께 우리 선조들의 기상이 한눈에 들어왔다. 418년 전의 전투, 혼자만의 울림이 아니라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민초들의 전쟁, 황석산성 전투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  황석산성 전투 시작1956년 11월, 일본군의 재침으로 인한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도체찰사 이원익으로 하여금 함양군과 안음현, 거창현 백성과 군사를 모아 황석산성을 지키도록 명했다. 이에 그는 안음현감 곽준에게 황석산성의 수비를 맡기고 김해부사 백사림에게 그를 돕도록 한다. 이때 함양군수 조종도와 거창좌수 유명개 등이 수성에 함께 참여했다. 황석산성은 황석산(해발 1193m)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축성된 산성으로 둘레 2.5km, 높이 약 3m, 문루는 나무로 만든 작은 형태의 물루고 추정된다. 성안에는 몇몇 부속 건물터가 있으며, 현재 남문지 일부 성벽만 복원된 상태이다. 동문지와 동북문지 방향은 경사가 아주 심한 절벽 지형으로 천혜의 방어적 요새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천혜의 요새인 황석산성에서 전투가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이 다음해 8월이니 수개월에 걸쳐 수성의 전략을 세우고, 성을 재정비하는 등의 시간적 여유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당시 함양을 비롯한 안의와 거창 등지 백성들을 소거하고 청야전술(적이 사용할 만한 모든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없애 적군을 지치게 만드는 전술)을 펼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황석산성에 집결하는 양군깎아지른 암벽으로 이뤄진 황석산성을 접근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주요 접근로로는 서하면 우전리에서 남문으로 접근하거나, 남문을 거쳐 서문으로 접근하는 방법, 그리고 황대리에서 동문으로 접근하거나, 유동마을을 거쳐 북문으로 접근하는 등 접근조차 쉽지않은 산성이 황석산성이다. 특히 동쪽과 북쪽의 경우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뤄져 접근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며 일본군 또한 산성을 점령하기 위해 수많은 계책을 쏟아냈을 것이다. 황석산성 전투에 대한 일부 기록이 남아 있으며, 이것 또한 많은 차이가 있다. 어느 것이 확실한가는 보다 많은 연구를 통해 이뤄져야 할 것으로 여기에는 함양군 등에서 그동안 편찬한 내용 등을 인용했다. 기록 등에 따르면 군사 수백명과 함께 민간인, 특히 남녀노소 백성 수천 명이 성안에서 농성을 준비한 것으로 보여 진다. 이때만 해도 조선의 원병 요청에 의해 명나라가 출진한 상황이었으나 황석산성까지는 닿지 못했다. 순수하게 조선의 관민이 맞서 싸운 전투이다. 당시 황석산성전투의 주요 지휘관은 체찰사(영남 전투사령관) 이원익이 임명했던 김해부사 백사림과 문신으로 함양현감 조종도, 안음현감 곽준, 의병장 정용, 그리고 정유문, 유명개 등이 참여했다. 군의 지휘관과 관군 그리고 인근 지역의 백성까지 약 7000명의 인원이 황석산성을 지키기 위해 결사의 의지를 불태웠다. 이에 비해 해안지역에 머물고 있던 일본군은 7월 말부터 활동하기 시작해 가토 기요마사의 군이 서생포에서 밀양을 거쳐, 초계, 거창, 안의로 침공해 8월 중순 황석산성을 마주보게 된다. 당시의 일본군 숫자에는 많은 이견이 있다. 기요마사 군 1만 명에서부터 다른 장수까지 포함한 2만7000명, 또는 정유재란에 투입된 일본군 우군 7만5000명 전체가 모두 동원되었다는 의견도 내 놓는다. 정확한 일본군의 숫자는 아니지만 일반 백성이 포함된 민관 7000명과 그 보다는 훨신 많은 수의 일본군의 일전을 앞두고 있었다. 전투의 시작과 마무리황석산성 전투는 1597년 8월14일부터 18일까지 5일간 이뤄졌다. 물론 직접적인 전투는 16일부터 18일 사이다. 정확한 기록은 아니지만 7000대 7만의 대결, 1대10의 대결, 성 내의 관군과 백성, 특히 남녀노소까지 포함된 조선군과 성을 함락하기 위해 잘 조련된 일본군의 싸움으로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황석산성 전투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없다. 전투에 참여했던 모든 이들이 전사해 기록이 남아 있을 수도 없다. 다만 여기저기 기록에서 처절했던 현장, 황석산성 전투의 기록이 비춰진다. 선조수정 실록을 보면 수많은 왜적이 남문으로 쳐들어오자 안음현감 곽준은 밤낮으로 독전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나 김해부사 백사림은 사세가 위급함을 알고는 그의 처자를 줄에 매달아 내려 보내고 도망하였다. 안음현감 곽준은 아들과 사위들이 모두 울면서 빨리 계책을 세울 것을 청하자 웃으며 ‘이곳이 내가 죽을 곳인데 무슨 계책을 다시 세운단 말인가’라고 말하며 분전하다 끝내 해를 당했다. 그의 두 아들 이상과 이후가 시체를 부둥켜안고 적을 꾸짖으니, 적이 이들도 함께 죽였다.라는 대목이 있다. 전투가 시작되자 민관군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싸웠다. 장수들과 관군, 그리고 백성들이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왜군과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남문이 함락되고 인해전술로 밀려드는 왜병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아녀자들은 천길 깎아지른 절벽에 몸을 날려 그 붉은 피가 아직도 맺혀있는 피바위 전설을 만들었다. 일부에서는 백사림이 도망가지 않았더라면 전투의 승패가 빨리 결정되지 않았거나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한다.어렵게 산성을 점령했으나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일본군은 화풀이 대상으로 성내 모든 이들을 참살하고 인근 고을을 약탈하는 등 엄청난 피해를 끼쳤다.잊혀지는 황석산성 전투황석산성 전투에 참전한 관민은 모두 순절했다. 여기서 참전했던 관군과 백성들의 수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히데요시의 감사장을 보면 ‘황석산성을 함락시켜 성내에서 353수의 목을 벤 뒤 계속해서 싸워 수천 명을 죽였다’라는 대목이 있다. 일본의 기록인 이것만 보아도 황석산성에서 수천 명이 순절한 것이다. 특히 황석산성 전투에서 전원 옥쇄하며 비록 패한 전투였지만 역사의 전면에 설 수 있었다. 그러나 은폐되고 축소되면서 산성에서 쓰러져간 선조들의 넋을 달래주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로 황성산성 전투는 명나라 군인이 한명도 참가하지 않은 일반 관민에 의한 전투였다. 당시 조선의 신분사회, 계급사회, 대의명분에 따라 별 지명도가 없는 지휘관과 일반 백성들이 참여한 전투는 당시로서는 부각될 수가 없었다. 친명 사대주의에 의해 황석산성 전투의 의의와 본질은 훼손되고 조정의 외면을 받았다. 특히 당시의 정치구도를 좌우했던 당쟁도 황석산성 전투를 뒷전으로 미룰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황석산성 전투는 남명 조식 선생의 후학들이 주축을 이뤄, 당쟁에 의한 정파적 이해관계로 외면받았다. 아울러 일본 정규군이 조선의 민관에 의해 대패한 사건으로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에 의해 전쟁기록 자체가 삭제되었다. 이는 황석산성 전투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황암사가 일본인들에 의해 불에 타 흔적조차 없어진 것이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처럼 조선 조정의 역사 인식이 오류, 그리고 일제에 의한 강제적 은폐까지 더해지며 잊혀진 백성의 전투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황석산성 전투. 그 황석산성 전투가 역사의 전면으로 나서기 위해서는 다양한 역사의 고증과 함께 지역민들이 황석산성 전투에 대해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한다.-다음 호에는 황석산성 전투와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남원성 전투와 만인의총 등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강대용 기자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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