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동안 계속되었던 최씨 무신정권은 최우 때 몽골족 칭기스 칸이 쳐들어와 막을 내립니다.(1231년). 최씨정권은 40여년간 강화도에 피신하고 있었습니다. 항복하고 개경으로 돌아가기로 하였지만 최씨 정권을 지키던 삼별초가 끝까지 항거하였습니다. 강화도(배중손)→진도(김통정)→제주도(김통정)로 쫓기며 항몽투쟁을 했지만 결국 전멸합니다. 이후 80년간 원의 지배를 받는 ‘원 간섭기’가 시작되었습니다. 4 권문세족 :권문세족(權門勢族)이란 원의 간섭을 받던 시기에 원의 세력을 배경으로 고려왕실에서 호가호위(狐假虎威)식으로 원의 세력을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둘렀던 무리를 말합니다. 원에 갔다 온 환관, 통역관, 원 앞잡이, 딸랑딸랑 원나라 관련 관리 등 새로운 권력자들입니다. 혜종(=순제)의 기황후[奇皇后] 오빠 기철 무리가 대표적입니다. 이런 권문세족은 원 간섭기 100년 동안 백성의 토지를 빼앗아 대농장과 수많은 노비를 소유했는데 <고려사>에는 ‘산과 하천으로 경계를 삼았다.’고 하였으니 그 횡포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충선왕과 충목왕이 개혁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마침내 명나라가 원나라를 북쪽으로 몰아내는 원명교체기의 틈을 타고 31대 공민왕은 원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피나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반원자주정책을 폈습니다. 또한 권문세족을 제거하고, 몽골풍을 고려풍으로 되돌리고 내정간섭기구 정동행성을 없애고 쌍성총관부를 쫓아내 옛 영토를 회복하고 신돈을 기용하여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땅과 노비를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는 대대적인 개혁을 시도하여 왕권강화를 시도하여 잘 나가는 듯 했는데 권문세족의 반대로 죽임을 당하고 개혁은 중도에서 끝나고 맙니다. 5 신진사대부 :공민왕은 권문세족의 권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성균관을 개편하고 무신정권 때 없어졌던 과거를 부활시켜 새로운 관리들을 뽑아 중앙관직에 등용시켰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지방 중소지주의 자제, 또는 지방 하급관리 향리의 자제들로서 중국의 성리학을 배우고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관직에 오른 젊고 패기에 찬 신진 사대부였습니다.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고 왕과 신하를 중심으로 한 유교정치를 주장했으며 권문세족의 폐단을 지적하였습니다. 고려는 기울어져가는 썩은 왕조이므로 개혁하거나 새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사상적 기반을 확립해 나갔습니다. 대표적인 신진사대부로는 정도전, 정몽주, 길재, 권근, 조준 같은 문신들입니다.    6 신흥무인세력 : 우왕 창왕 공양왕으로 이어지는 고려 말기 전국의 혼란한 틈을 타고 북쪽에서는 머리에 붉은 두건을 쓴 홍건적(=후에 명)이 쳐들어 왔고, 남쪽으로는 왜구가 침범하여 해안 마을을 약탈하여 그 피해가 엄청나게 컸습니다. 이에 명을 받고 전국 각지로 나가 싸운 무명의 장군들이 승전을 거두며 점점 유명해졌습니다. 백성의 신망을 받으며 새로운 무인세력으로 성장하여 군사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는데 이 사람들을 고려 중기의 무인과 구별하여 ‘신흥무인세력’이라고 불렀습니다. 최영은 홍산대첩, 이성계는 황산대첩, 최무선은 진포대첩, 정지는 관음포 대첩 등 많은 전쟁터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박위는 대마도(쓰시마)를 정벌하였습니다. 이때 중국을 차지한 명이 원(몽골)을 북쪽으로 쫓아내고 고려에게 원이 차지하고 있던 철령 이북의 땅이 자기들의 것이니 내놓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에 고려 우왕과 최영장군은 일전을 불사하고 요동정벌을 위하여 요동(만주)를 향하였습니다. 최영은 이성계를 선봉장으로 삼아 군사 5만을 주어 압록강을 건너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성계는 압록강 위화도에 이르자 고민에 빠졌습니다. 승산 없는 싸움을 할 것이냐 회군(回軍)을 하여 무지한 군인(농민)을 구할 것이냐. 그는 4불가론(4不可論)을 내세워 위화도에서 군사의 말머리를 돌려 반역을 꾀하였습니다. 4불가론이란 1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2농사철에 농민을 군인으로 동원하여 싸우는 것은 옳지 않다. 3여름 장마철의 전쟁은 전염병과 무기(활)의 성능을 떨어뜨린다. 4북쪽을 치다가 남쪽의 왜구가 쳐들어오면 나라가 위태롭다는 주장을 하고 개경으로 돌아와 우왕과 최영장군을 제거하고 군사적 기반을 내세워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게 됩니다.(1388년 위화도 회군). 이성계 옆에는 명석한 실력자 브레인 참모 신진사대부 급진파 정도전이 있었습니다. 그에 의해 권문세족의 땅을 빼앗고 새 관리들에게 땅을 주는 ‘과전법’이 시행되어 경제적 기반을 장악하고(1391년) 공양왕이 왕위를 내놓자 이성계가 추대되어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이루며 고려의 500년 왕조는 끝나고(1392년)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은 신흥무인세력인 이성계가 새 왕조 ‘조선(朝鮮)’을 창업하였습니다.(1392년) 마침내 정도전은 비록 신하였지만 태조 이성계를 왕으로 받들며 법에서 행정에 이르기까지 조선이란 나라의 틀을 짜고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는 고려의 개경(개성)을 버리고 새 터전에 왕궁과 4대문을 짓고 한강인 청계천을 중심으로 계획도시를 구상하여 정비하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듯 수도 한양(지금의 서울)으로 천도하여(1394년) 조선의 새 역사를 열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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