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걸었다. 상림 옆으로 쭉 뻗은 길이었다. 왼쪽으로는 우산을 펼쳐놓은 듯한 푸른 연잎이 살랑거렸다. 맞은편에는 노란 해바라기가 심어져 있었다. 지난 봄 붉은 양귀비가 가득했던 곳이었다. 커다란 얼굴로 해를 바라보던 꽃은 얼굴 가득 씨앗을 물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바람에 씨앗들이 여물어 갔다. 조금 더 들어가니 이제는 코스모스가 가득이었다. 혼자 피어도 아름다운 꽃, 무리지어 피면 더욱 아름다운 꽃이 코스모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길옆에 갈색의 이정표가 보였다. 세종왕자 한남군 묘역(경상남도 기념물 제165호)이라고 적혀 있었다. 한남군 묘는 함양읍 교산리 속칭 한남골에 위치한다. 물빛 같은 하늘을 보며 걷다보니 비석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조금 높은 곳에 파란 무덤이 보였다. 상림 숲을 바라보며 동자석과 문인석이 호위하는 가운데 한남군이 잠들어 있었다. 묘역은 누군가에 의해 깨끗하게 벌초가 되었다. 무덤 뒤로는 푸른 소나무들이 담장처럼 둘러서 있었다. 바람이 불때마다 키 큰 소나무들이 수런수런 거렸다. 한남군은 세종 11년에 세종의 아들로 태어난다. 세종대왕의 12남이며 혜빈 양씨의 3남 중 장남이다. 천성이 착하고 온순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처신이 단정하고 온공(溫恭)하여 세상 사람들도 그를 추앙하였다. 왕자로 태어났다는 것은 축복받은 일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운 나쁜 일이기도 했다. 1455년 음력 6월11일 단종대왕이 왕위를 물려줄 때에 한남군은 어머니인 혜빈 양씨를 비롯해 두 동생과 함께 화를 입었다. 혜빈은 참화를 당하고 한남군은 귀양을 갔다. 살뜰한 어머니를 여의고 자식들과 멀리 이별하여 어느 바람세찬 쓸쓸한 거리 끝에 멈추어 섰다. 그곳이 함양 한남마을 앞 새우섬이었다. 1457년(세조 3)에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더불어 영·호남 선비들과 단종대왕 복위를 도모코자 했다. 한남군은 금성대군의 모사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일이 발각되어 금성대군은 처형되었고 한남군의 안치소에 방금(防禁)조건이 강화되었다. 사육신과 함께 처형되어야 한다고 신하들의 상소가 빗발쳤으나 형인 세조의 반대로 참형만은 면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하루하루 당신의 슬픔이며 아픔을 소처럼 새김질하며 지내야 했다. 세조를 향한 원망과 괴로운 악몽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다. 마침내 병을 얻어 고통 중에서도 약 한 첩 써 보지 못하고 1459년(세조5년)유배지에서 쓸쓸히 죽어갔다. 그의 나이 향년 31세였다. 때어날 때는 왕의 아들이었으며 죽음을 맞이할 때는 역모를 도모한 죄인의 신분이었다. 등잔 밑이 가장 어둡듯이 한남군의 삶은 세상의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어쩌면 인생에서 울고 웃는 것은 끽해야 판자 두께 차이인지도 모른다. 삶에서 시작하기보다 어려운 것이 끝맺는 것이라고 한다. 태어나기보다 어려운 것이 잘 죽는 일이라고도 한다. 과연 한남군은 장형이었던 문종대왕의 유지를 끝까지 고수하며, 대의(大義)를 위해 인생을 잘 마무리 했던 것일까. 세상사 돌아가는 것은 예측 할 수 없다. 많은 피를 흘리며 왕위에 오른 세조의 치적에는 괄목할 만한 것이 많다. 세조가 신하와 육친을 죽인 건 사실이지만 왕권을 잡은 후 펼친 선정은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그럼 한남군의 선택이 잘못되었던 것일까. 인생사에는 옳고 그른 것이 명확하지 않다. 때로는 옳은 일이 옳지 않은 일이 되기도 하고, 옳지 않는 일이 옳은 일이 될 때도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비록 한남군의 마지막이 고통스럽고 쓸쓸했지만 당신의 소신을 위해 살아간 삶이었기에 염라대왕 앞에서 무서움은 없었을 것이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