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숲 상림공원 필봉산 기슭에서는 지금 고운 최치원 선생 역사공원 조성 사업이 한창이다. 마침내 구천을 떠돌던 신라 6두품 선비의 영혼이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비로소 마련되고 있다. 2015년 완공 예정으로 예산 50억원이 투입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렇다면 최치원(崔致遠)은 누구일까? 함양과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부산 해운대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그 이름이 최치원의 자 해운(海雲)에서 따와 지은 이름이라면 가히 최치원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최치원(字孤雲, 海雲)은 9세기 통일신라 말 6두품(六頭品) 출신의 학자이다. 857년 경주 최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12살 어린 나이로 중국 당 나라로 유학을 떠나 18살 나이로 어렵다는 당나라 과거시험 빈공과(외국인 대상)에 합격한 천재소년이었다.(874년)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써서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이 무렵 최치원이 쓴 글은 1만여 편에 이르렀는데 당 나라에서 17년 동안 머무르며 나은(羅隱) 등 문인들과 친교를 맺고 문명(文名)을 떨쳤다.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에도 <사륙집(四六集)>과 <계원필경(桂苑筆耕)> 등 그가 저술한 책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니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것이다. 신라로 돌아온 뒤 신라 49대 헌강왕 아래서 학림학사로 근무했지만 헌강왕이 죽자 외직(外職)으로 물러나 태산군(전라북도 태인), 천령군(天嶺郡, 경상남도 함양), 부성군(富城郡, 충청남도 서산)의 태수(太守)를 지내며 중앙에서 밀려나 있었다. 시대를 제대로 만나지 못해 문관으로의 탁월한 실력을 나타내지 못하고 떠돌아 다녀야 했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건국부터 진흥왕까지 신라 상대(上代), 무열왕에서 혜공왕 때까지를 신라 중대(中代), 선덕왕부터 마지막 경순왕 때까지를 신라 하대(下代)로 구분하였다. 상대는 신라의 성장기였으며 중대는 신문왕을 중심으로 한 전제왕권 강화기였다. 그러나 신라 하대로 접어드는 선덕왕 때부터는 골품제가 무너지고 누구나 권력과 세력이 있으면 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중앙 귀족간의 권력투쟁이 극에 이른다. 혜공왕이 암살당하고 김헌창의 난이 일어나고(822년). 왕권이 약화되자 귀족 세력이 강화되고, 중하급 관리 6두품은 찬밥 신세가 되어 새롭게 등장한 지방 세력가 호족과 결탁하게 된다. 신라 말, 고려 초 호족(豪族)을 모르면 안 된다. 중앙의 지방통제가 불능에 빠지자 대농장을 소유하고 경제력을 바탕으로 사병을 키운 지방 세력가로 독립적 지배자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스스로를 성주, 장군을 칭하면서 패권을 장악하였다. 6두품과 연계하여 신라 반체제 세력이 되었다. 또한 유학과 선종, 풍수지리 사상을 받아들여 사상적 기반으로 삼고 새로운 나라, 새로운 왕, 새로운 도읍지를 세워야 한다고 여론을 형성해 나가고 있었다. 그 호족들이 바로 후삼국의 주체가 되는 견훤, 양길, 궁예, 왕건 등의 인물이다. 이러한 난세에 젊은 해외파 유학자 최치원이 아무리 실력이 있다 한들 누가 알아주겠는가? 최치원이 894년 진성여왕에게 나라를 개혁하는 10여 조의 시무책을 제시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발로 실현되지 못했다. -최치원이 서쪽으로 당에 가서 벼슬을 하다가 고국에 돌아왔는데 전후에 난세를 만나서 처지가 곤란하였다. 걸핏하면 모함을 받아 죄에 걸리겠으므로 스스로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다시 벼슬할 뜻을 두지 않았다. 그는 세속과 관계를 끊고 자유로운 몸이 되어 숲 속과 강이나 바닷가에 정자를 짓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으며 책을 벗하여 자연을 노래하였다.- 「삼국사기」 최치원은 관직에서 물러나 각지를 유랑하였다. 그리고 만년에는 가야산 해인사에 머물렀다. 정확한 사망 년도는 확인되지 않으며, 방랑하다가 죽었다거나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그는 경주의 남산, 합천 매화산의 청량사, 하동의 쌍계사 등을 즐겨 찾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유교정치 이념을 기반으로 골품제도라는 신분제의 사회적 문제를 극복하려고 했던 그의 사상은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산비문(四山碑文)’가운데 하동의 쌍계사에 있는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는 최치원이 직접 짓고 해서체로 쓴 것으로 오늘날까지 그의 필적을 전해준다. 그의 문집 「계원필경」에서 「추야우중」(秋夜雨中,가을밤 내리는 빗속에)은 그의 만년 슬픔을 말해 주는 것 같다. 명예와 권력이 덧없음을 노래한 고운선생의 시 한수 감상해보자.   秋風唯苦吟(추풍유고음) 가을바람에 이렇게 힘들여 읊고 있건만 世路少知音(세로소지음) 세상 어디에도 날 알아주는 이 없네. 窓外三更雨(창외삼경우) 창밖엔 깊은 밤비 내리는데 燈前萬里心(등전만리심) 등불 앞에 천만 리 떠나간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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