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에 의해 불교가 성립되고 중국으로부터 4세기경 소수림왕 때 전진의 순도에 의해 고구려에 전래된다(372년). 백제는 침류왕 때 동진으로부터 마라난타에 의해 불교를 받아들이게 된다. 지리적 조건으로 가장 나중에 불교를 접한 신라는 5세기 눌지왕 때 고구려 묵호자에 의해 전래되나 귀족들의 반대로 6세기 법흥왕 때 가서야 이차돈의 순교가 계기가 되어 불교를 공인하게 된다. - 이차돈의 목을 베자, 그 잘라진 목에서 흰 피가 석자나 용솟음쳐 나왔는데 그 빛이 젖빛처럼 희었다. 이를 본 여러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겨서 다시는 불법을 시행하는 일에 반대하지 않았다.- 김대문이 지은 계림잡전에 기록된 내용을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옮겨 실은 것이다. 삼국시대의 불교는 왕이 곧 부처라는 미륵불 사상인 왕즉불(王卽佛) 사상과 나라를 지키는 호국불교의 특징을 갖는다. 새로운 국가정신을 확립하는데 기여하고 왕권을 이념적으로 뒷받침 해주었다. 불교하면 원효와 의상을 떠올려야 한다. 고려에서는 의천과 지눌을 새겨야 하고 더불어 연등회와 팔관회를 기억해야 한다. 661년 원효와 의상이 중국 당나라로 스님공부를 하러 유학길에 올랐다. 충남 직산지방에서 날이 어두워 하룻밤 동굴에서 자게 된 원효는 잠자다 갈증을 느껴 옆에 있던 물바가지의 물을 마셨다. 아침에 보니 그 물은 해골에 담긴 물이었다. 우웩! 우웩! 다 토해냈다. “해골에 담긴 물은 어젯밤이나 오늘이나 똑같은데, 어이하여 감로수 물이었던 것이 오늘은 구역질을 나게 하는가? 그렇다! 어제와 오늘 사이에 달라진 것은 내 마음 뿐이다. 진리는 결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원효는 그 길로 유학을 가지 않고 돌아와 국내파로 불교에 정진했다. 의상은 예정대로 유학길을 떠나 공부하고 해외파로 돌아왔다. 후에 원효와 의상은 통일신라 불교의 두 줄기를 세우게 된다. 원효는 불교의 대중화를 이룩한 스님이다. 그동안 불교가 귀족 사이에서만 불법이 전해졌는데 원효는 누구든지 나무아미타불만 불러도 부처가 되고 부처의 가피를 입는다고 말했다. 무지렁이 백성에게는 너무나 쉬운 방법이었다. 원효는 모든 것이 한마음에서 나온다는 일심사상을 설파하며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에 힘쓰는 한편 ‘십문화쟁론’,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등 많은 책을 썼다. 그는 태종 무열왕 둘째딸 요석공주와도 결혼하여 이두를 만든 설총을 낳기도 하는 자유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진골출신 의상은 화엄종을 창설하여 화엄사상을 펼쳤다. 화엄이란 ‘하나가 곧 일체이며 한 작은 티끌 속에 시방(十方)이 있는 것이요 한 찰라가 곧 영원이다(화엄일승법계도)’라는 화엄종을 이룩하고 관음신앙을 펼쳤다. 그래서 현세의 고난에서 구제 받으려면 현세의 보살이신 관세음보살에게 빌어야 한다고 설파했다. 그래서 오늘날 불교신자들은 원효의 ‘나무아미타불’과 의상의 ‘관세음보살’을 대뇌이며 부처님의 은덕과 극락영생을 갈구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혜초는 부처의 땅 인도(왕오축국五天竺國)를 걸어서 직접 갔다 와 ‘왕오천축국전’을 썼으니 신라는 말 그대로 불교의 나라다. 그래서 왕마다 연등회와 팔관회를 성대히 펼치며 불국(佛國)에 힘썼다.  경덕왕 10년 김대성이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였다. 이 불국사 뜰에 서있는 그림자가 없는 탑 석가탑(불국사 삼층석탑) 즉 ‘무영탑(無影塔)’에 얽힌 ‘아사달과 아사녀‘의 아주 슬픈 사랑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아사녀는 불국사에 석공으로 일하러 떠난 남편이 그리워 불원천리 서라벌을 찾아갔다. 그러나 탑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여자를 들일 수 없다는 금기 때문에 남편을 만나지 못한다. 탑이 완성되면 이곳 못에 탑의 그림자가 비칠 것이니 그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했다. 그 이튿날부터 아사녀는 온종일 못을 들여다보며 탑의 그림자가 비치기를 기다렸지만 나타나지 않았고 기다리다 지친 아사녀는 환상을 보고 못에 빠져 죽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남편 아사달마저 그녀를 따라 갔다는 줄리엣과 로미오보다 더 슬픈 사랑 이야기가 석가탑의 전설로 내려온다. 어디 그것뿐이랴. <에밀레종>이라고 불리우는 <성덕대왕신종>이 있다. 높이가 3.6m로 세계 범종 가운데 가장 뛰어난 종으로 평가된다. 혜공왕(惠恭王) 7년(771년)에 완성되었는데 구리 12만 근이 소요된 이 종은 어린아이를 집어넣어 만들었다는 전설과 함께 종소리가 어머니를 부르는 듯 ‘에밀레-에밀레-’하다고 하여 ‘에밀레종’이란 이름으로 불리운다. 봉덕사 노스님이 시주를 부탁하자 어미는 그만 이렇게 말했다. “너무 가난해 시주할 것이 없어요. 이 아기라도 괜찮다면 데려가세요.” 말이 씨가 되었다. ‘산 사람의 생명을 넣지 않으면 종소리가 나지 않을 것이다.’ 라는 현몽에 아이는 바쳐졌고 종소리는 에밀레- 소리로 났다. 이처럼 신라의 불교는 원효와 의상의 가르침으로 꽃피우지 않은 곳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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