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랑살랑 사근산성 역사 놀이터>의 다음 목적지인 연화산으로 향했다. 수동면 원평리, 그곳에는 사근산성이 있다. 사적 제152호이며 함양의 외성(外城)이라고도 불렸다. 예전에 사근역원(沙斤驛院)이 있었기 때문에 사근산성이라 이름 지어진 것이다. 사근산성은 영남지방과 호남지방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신라, 백제의 국경분쟁과 왜구의 침략에 시달렸던 지역이었다. 《함양읍지》에 성을 친 왜구는 단숨에 함양을 함락시키고 전라도 남원군 인월(引月)에 쇄도하였다가, 때마침 출동한 이성계(李成桂)에 의하여 황산(荒山)에서 격파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형적으로 세 방향으로 남강을 끼고 절벽을 이룬 전략지였다. 그러기에 호남지방의 곡창지대를 노리는 왜구의 침입을 차단하는 중요한 구실을 했던 곳이다. 연화산 밑에 도착을 했다. 사근산성으로 가는 길을 정확히 모른 채 무작정 나선 적이 두어 번 있었다. 근처에 가면 산성으로 가는 이정표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이정표는 없었다. 밭에 일을 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고, 길을 걸어가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지인으로부터 대충 들은 설명으로는 산성으로 가는 길을 알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 서고는 했다. 모두들 산성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오전 내내 구름에 가려 있던 해가 그때는 쨍쨍거렸다. 늙은 할머니의 허리 마냥 휘어진 길을 걸어 푸른 나무가 우거진 숲속으로 들어갔다. 무성하게 우거진 나뭇잎이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길은 그리 넓지도 가파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오솔길처럼 좁은 길도 아니었다. 어릴 때 뛰어다녔을 법한 그런 길이었다. 그러고 보니 함께 역사 놀이터에 참여한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모두를 토끼처럼 혹은 노루처럼 뛰어서 눈앞에서 사라진 것이다. 어릴 때 나도 걷는 것 보다는 뛰어 다닌 적이 더 많다. 친구 집에 갈 때도 뛰어 갔고 학교에 갈 때도 뛰어갔다. 지금은 뛰는 것이 힘이 든다. 그때보다 키는 훨씬 더 자랐고, 팔다리도 더 길어졌다. 힘도 더 센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된 우리는 더 이상 뛰어다니지 않는다. 뛰기는커녕 많이 걷는 것조차 힘들어 하는 세월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요즘은 걷지 않는 어른들을 자연으로 불러내기 위해 길들이 유행하고 있다. 둘레길 올레길 몰래길······, 사근산성으로 가는 길도 그런 이름이 붙여져 사람들이 산책을 하듯, 소풍을 하듯 많이 이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산성이 보였다. 지난 해, 산사태로 무너진 산성을 한창 복원하고 있었다. 석축의 잔존부분은 직사각형의 편평한 자연석 또는 가공석으로 어금쌓기로 되어 있었다. 축조상태는 매우 견고하여, 본래의 높이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부분이 많다고 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31 〈함양군 성곽조(城廓條)〉에는 사근성의 석축 둘레가 2,796자라 하고, 그 안에 3개의 연못이 있다 했다. 공사 중이라 연못의 위치는 대충의 눈짐작만으로 확인 하고 산성을  따라 정상을 올랐다. 발밑을 보니 함양군이 모두 눈에 들어오는 듯 했다. 집에서 연화산을 바라보면 산성이 뚜렷이 보였다. 어디쯤이 나의 집일까. 딱히 나의 집은 보이지 않았다. 산 아래 옹기종기 자리 잡은 집들은 패총의 조개껍질처럼 납작하니 땅에 붙어 있었다. 자세히 보면 집들의 모습은 가지각색이었다. 그러나 산에서 내려다보면 그냥 하나의 집일뿐이었다. 저 집들 속에는 무게가 다른 각각의 고민이, 외로움이, 그리고 욕망이 이끼자국처럼 피어 있을 것이다. 결국 삶이란 것은 고민과 외로움과 욕망이 세월의 바람에 씻기고 닳아지고 부셔지며 인생의 깊이를 배워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산꼭대기에 서니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왔다. 잠시 눈을 감고 바람의 소리를 들었다. 바람이 산성에 부딪치는 소리,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 망초꽃대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마음이 편안했다. 지진 삶에 자연이 주는 위로가 있어 그래도 삶은, 살아갈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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