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어느 날, 함양문화원에서 ‘같이 공유하는 함양문화재의 가치(價値)’ 사업명 아래 <살랑살랑, 사근산성 역사 놀이터> 프로그램 참가자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게 되었다. 공고를 보자마자 얼른 문화원에 전화를 걸어 참가 신청을 했다. 다양한 프로그램 진행과 점심까지 준비된 행사였다.21일 함양문화원에 사람들이 모였다. 그날 하늘에는 여름날의 따가운 햇살도 없었고 바람도 살랑살랑 불어왔다. 어딘가로 놀러가기에 좋은 날씨였다. 첫 목적지는 호연정이었다. 호연정은 국궁(國弓) 연마하는 곳이다. 국궁은 전통 활을 쏘아 과녁을 맞추며 승부를 겨루는 대한민국의 전통 무술이다. 처음으로 활을 잡고 화살을 쏘아보는 기회가 주어졌다. 내가 쏘는 화살은 화살답지 않게 멀리가지 못했다. 그래도 전통무술을 한번 경험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뿌듯했다. 다음 목적지는 상림(上林)이었다. 함화루(咸化樓)를 거쳐 척화비(경남문화재자료 제264호)앞에 섰다. 오래전 본래의 모습으로 넘어져 있던 것을 바로 세워 놓았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의  눈물이었을까. 조금씩 가랑비가 내렸다. 하얀 망초꽃이 비석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피어 있었다. 흙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피는 꽃이다. 망초꽃이 피어 들판이 하얗게 물들 때 조선은 망했다. 저것이 하얗게 피어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꽃, 그래서 붙여진 이름 망초······. 그 꽃이 척화비와 같이 서 있었다.비(碑)에는 붉은 글씨로 ‘洋夷侵犯(양이침범) 非戰則和(비전즉화)-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主和賣國(주화매국)-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라고 크게 새겨져 있다. 흥선대원군은 1866년(고종 3년)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의 신미양요(辛未洋擾)를 겪으며 서양과는 절대 교류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고취하고자 전국 곳곳에 척화비를 세웠다. 이 시기는 서구 열강들의 침입으로 어렵기도 했지만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이룰 수 있는 기간이기도 했다. 그러기에 발달된 서양 문명을 받아들여 힘을 기르자는 의견도 있었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발발하면서 대원군이 청나라로 끌려갔다. 비로소 조선은 문호를 개방하게 된다. 서구 각국과 교류가 시작되면서 대부분의 척화비들은 훼철되거나 철거되어 땅에 묻혔다. 전국에는 척화비가 20개가량 남아 있다.사람들은 대원군을 떠올릴 때마다 “쇄국 정책으로 한동안 서양 세력을 막을 수 있었지만 근대화에 늦어졌다”는 말을 고명으로 얹는다. 근대화가 늦어졌다? 그러면 근대화를 일찍 이룬 일본의 현재 모습은 어떠한가. 근대화가 늦게 이루어진 우리의 현재 모습은 어떠한가.  어릴 때 일본은 세계 최고의 기술을 갖춘 나라로 여겨졌다. 너도나도 일본제품 하나쯤은 갖고 싶어 했다. 어른들은 일제 코끼리 밥솥을, 라디오를, 카메라를 갖고 싶어 했고, 우리들은 일제 샤프펜슬을 혹은 필통을, 가방을 갖고 싶어 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상황이 바뀌어 버렸다. 사람들은 일본제품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세계는 지금 ‘korea’에 열광하며 환호를 보내고 있다. 근대화가 늦어진 한국은 결국 세계 최고가 되어 생의 절정을 누린다.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이 있다. 세상만사는 변화(變化)가 많아 어느 것이 재앙이 되고, 어느 것이 복(福)이 될지 예측(豫測)하기 어렵다. 재앙은 언젠가 복을 불러오고 복은 또 언젠가 재앙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그러니 어려운 일을 당했다고 슬퍼할 게 못되고 좋은 일이 생겼다고 기뻐할 것도 아닌 것이다. 또한 인생에는 절정의 순간이 반드시 있다. 그것에 대한 확신만 있다면 조금 늦게 인생의 절정을 이룬다고 해서 조급한 마음을 가질 필요는 없지 않을까. 다만 최고의 날을 위해 하루하루를 잘 살아야 할 것이다. 부끄럽지 않게, 사람답게 살아야 할 것이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