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822가구의 귀농·귀촌 인들이 ‘제2의 삶의 터전’으로 함양을 선택했다. 수많은 귀농 귀촌 인들이 찾은 만큼의 성공 스토리와 실패담이 다양하게 이야기되고 있다. 함양지역에서 비교적 성공적인 정착을 통해 지역사회 일원으로 생활하고 있는 이들을 만나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엮어 나가려 한다. 여기에 소개되는 이들과 같은 귀농의 절차를 밟아 가라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소개하는 이들은 대부분의 귀농 귀촌한 이들이 겪었을 법한 다양한 어려움을 겪었으며 이를 슬기롭게 극복했거나, 지금 현재도 어렵지만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귀농의 어려움, 주변 갈등 등 직면하는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쉽게 풀어나갈 수 있도록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다. <편집자 주>글 싣는 순서1. 함양에 살으리랏다! 귀농천국 함양군2. 이래야 성공한다! 성공한 귀농 이야기13. 이래야 성공한다! 성공한 귀농 이야기24. 귀농인의 천국 전북 고창군5. 대한민국 귀농밸리 하동군이래야 성공한다! 성공한 귀농 이야기1“10년을 준비해 수확의 기쁨을 보기까지”호두 농사꾼 강극희·안강자 부부“시행착오도 있었고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너무도 행복합니다.” 지난 10년간의 귀농 정착기를 떠올리는 강극희씨. 힘들고 어려운 일들도 많았고 좌절을 겪기도 했지만 지금의 행복의 밑거름이 됐다고 말한다. 지난 2004년 귀농을 결심한 강극희·안강자 부부가 함양읍 죽림리 시목마을에 터전을 일구기까지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50대의 서울내기는 환갑이 넘었지만 이제는 완연한 농사꾼으로 거듭났다. 조금은 생소한 호두농사를 짓는 부부는 본격 귀농 5년차다. 10년 전인 2004년부터 귀농을 결심하고 우연히 알게 된 현재의 부지에서 호두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그 당시는 완전한 귀농이 아니라 기반을 닦아 나가던 시기였다. “처음에는 나무가 우거진 황무지나 다름없었지요. 조금씩 쓸모없는 나무들을 베어내고 나무를 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들어와서는 살 집도 없었다. 집터를 마련하기까지 1년이 걸렸다. 당시에는 임시 움막을 짓고 그곳에서 기거했다고. 서울 직장이 마무리되지 않아 금요일 밤 버스를 이용해 함양에 내려와 일요일 밤까지 일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생활을 했다. 강극희씨의 주 작목은 호두다. “호두를 너무 좋아했습니다. 나중에 서울 생활이 지겨워지면 호두 농사를 지어 볼까 항상 생각했는데, 꿈이 이뤄진 것입니다.” 7000평 임야에 호두나무를 심기 시작할 당시만 해도 언제 커서 수확할 수 있을까 조금은 걱정이었다. 특히 6~7년은 지나야 수확할 수 있는 호두나무를 심는 그의 모습을 보고 조금은 의아해 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의 부인 안강자씨는 6살 때부터 서울생활을 시작해 서울 토박이나 진배없다. “처음에는 호미가 뭔지도 몰랐지요. 호미질을 하다가도 제대로 되지 않아 손으로 풀을 뽑기도 하고. 너무 서툴다고 남편이 핀잔을 주는데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을 어찌 잘 하겠어요.”라며 웃었다. 이에 반해 강극희씨는 타고난 농사꾼이다. 그도 40여년을 농사일을 하지 않아 농사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이지만 끈기와 노력으로 모든 것을 만들어냈다. 특히 호두나무는 지역에서도 많이 재배하지 않는 농산물로 모든 것을 직접 터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전문교육을 받을 수 있는 것도, 그렇다고 어디 물어볼 수 있는 곳도 없었어요. 농약을 사용해야 하는데 농약상에서도 호두나무와 관련한 농약을 파는 곳도 없었지요.” 그렇게 부지깽이 같은 호두나무를 심은지 8년째 수확의 기쁨이 찾아왔다. 씨알 굵은 호두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호두나무를 볼 때마다 자식 같은 기분이 들어 든든하다. 그가 키운 호두나무들은 ‘두야’라는 애칭이 붙어 있다. “모두가 제 자식 같은 놈들입니다. 그 중에는 이쁜 놈도 있고, 말썽을 부리는 놈들, 제 몫을 하지 못하는 놈들도 있지만 모두가 제가 키운 귀중한 나무들이지요.”비교적 많은 나이에 귀농한 그에게 친구들이 ‘미쳤냐’라고 말할 때도 있었다. 편하게 살 수 있는데 왜 시골에 내려가서 고생을 하느냐는 것이다. “도심 속에서 살다보니 어느 순간 아스팔트 냄새가 싫어졌습니다.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에서 즐겁게 생활하기 위해 내려온 것입니다. 조금은 젊어 고생해서 지금 수확의 즐거움을 느끼지 않습니까.”그는 귀농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철저한 계획을 통해 실천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의 뚜렷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그냥 가서 해볼까 하면 너무 많은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라며 조언하기도 했다. 부지런하게 모든 농사일을 척척 해나가는 그지만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마을에서의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역 텃새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파고 들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도시에서 생활할 때 자신이 어떤 위치였던지 간에 그것에 시골 생활에서는 전혀 필요가 없습니다. 다 버리고 마음의 문을 열고 먼저 다가서야 합니다.” 마을 주민들과 가까워지자 나서서 자장면이나 냉면, 비빔국수 등을 주민들과 나눠 먹으며 더욱 가까워지고 있다. 현재 마을 노인회 총무를 맡고 있는 그. 마을에 들어온 지 3년 만에 이장을 맡아달라는 부탁도 받았지만, 그것만은 할 수 없어 거절하기도 했다. 지금은 마을의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그를 찾는 등 마을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위치에 놓이게 됐다.“물론 몸은 많이 힘들지요. 그렇지만 밭에 나가면 자식 같은 작물들에게서 기를 받는 것 같습니다. 즐겁고 재미있습니다.” 서울댁으로 변신한 안강자씨가 귀농의 즐거움을 말했다. 처음에는 너무나 힘들었지만 차츰 숙달은 아니지만 함께 일하며 수확을 하는 기쁨을 알고 있다. 그의 텃밭에는 온갖 야채들이 즐비하다. “내가 생산한 수확물을 직접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너무 행복합니다. 애지중지 작은 걸 키워서 열매가 달리는 것, 이것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행복입니다.” 항상 친우들이 찾아오면 한아름 선물로 싸서 보내고, 찾지 못하는 친우들을 위해 제철 농산물을 서울로 보내주기도 하는 등 시골 인심을 마음껏 보여주고 있다. 호두 무게를 이기지 못해 가지들이 찢어지기도 해 가슴이 더욱 아프다는 강극희씨. 그렇게 많은 수확을 내게 하는 호두나무에게 그는 매일 수십번은 절을 한다. 나무를 지날때마다 어루만져 주기도 하고, 주변에 높게 자란 풀들을 자를때도 고개를 숙인다. 2년 전부터 그동안의 노력의 보상이라도 주려는 듯 가지가 휠 정도로 호두가 주렁주렁 달렸다. 지난해에는 호두 산지로 유명한 강원도 지역 호두 농가 사람들이 그의 농장을 둘러보고 너무나 튼실한 호두나무에 놀라기도 했다. "주렁주렁 매달린 호두알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너무도 행복해집니다. 조금만 달려도 되는데 왜 이렇게 많이 매달려 힘들어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태풍이 불면 그가 아끼는 나무들이 상하지 않을까 항상 노심초사 하는 강극희씨. 힘들어하는 자식같은 나무들을 위해 지지대를 받치고, 줄을 묶어 보호하고 있지만 강풍이 불어올 경우 상처가 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강극희씨 부부는 자식같은 호두나무들과 함께 더운 여름을 행복하게 이겨내고 있다. 그렇다고 그의 농사일이 적은 규모는 아니다. 호두를 비롯해 전체적으로 1만평 규모다. 소농은 아니라는 것이다. 대부분을 자급자족 하다보니 이것저것 손도 많이 갈 수 밖에 없다. 이처럼 행복했던 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 이곳에 자리를 잡고 집을 짓기 시작할 무렵, 부부는 움막을 짓고 1년간 생활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다 할 연고가 없는 이들에게 선뜻 잠잘 곳을 내주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1년여 생활하며 갖은 고생을 겪었다. 2012년에는 조금의 수확을 목전에 두고 태풍으로 인해 수확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정성들여 키운 나무들이 쓰러지고 부러지고, 가슴이 무너지는 아픔도 겪었다. “정말 힘들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목표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견뎌낼 수 있었고, 지금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 1만평 농사일은 쉴 사이가 없다. “꾸준하게 땀 흘린 만큼 수확할 수 있는 것이 농작물입니다.”라고 말하는 강극희씨. 새벽 4시에 일어나 시작되는 농사일은 해가 져서야 끝이 난다. 한번에 창고를 짓기 위해 귀농인들에게 주어지는 지원 사업을 신청했지만 탈락했다고.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농사짓기도 바쁜데 교육을 받을 시간이 있어야지요. 농사를 적게 짓는 귀농인들이야 낮 시간에 교육을 받을 시간이 있지만 눈코뜰새 없이 바쁜데 교육을 어찌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항의를 해 보았지만 제대로 된 답변을 들을 수 없었다.  강극희씨 부부는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지만 귀농은 정말 잘했다고 봅니다. 물론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끈기와 노력으로 이겨내고 우리가 원하던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시행착오 겪으면 무궁무진한 기회가 주어진다”공명재·김민재씨 부부“귀농 초반의 어려움을 잘 이겨낸다면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귀농입니다”귀농 4년차 초보 농군인 공명재(39)씨. 함양군 백전면에서 아내 김민재(36)씨와 함께 ‘님과 함께’라는 농장 이름으로 오미자를 재배하고 있는 젊은 초보 농사꾼을 만났다. 백전면 경백리 산중턱에 자리 잡은 그의 집은 바로 앞 저수지와 함께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물 맑고 공기 좋은 곳, 그리고 본업인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는 곳을 찾아 엄청나게 많은 곳을 다녔습니다. 그리고 발견한 곳이 이곳입니다”공명재씨는 지난 2010년 9월 지금의 자리에 터를 잡았다. 앞서 그는 고향인 통영에서 인테리어 자재 판매업 등 자영업을 하던 업체 대표로 수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거래업체에서 대금을 갚지 않고 도망가기도 하고, 납품한 곳의 부도로 인해 대금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스트레스가 쌓이다 보니 몸도 많이 축나면서 귀농이라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평소 막연하게 귀농의 꿈을 꾸면서 귀농 적지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산청지역으로 6개월 동안 지역 곳곳을 다녔지만 적지를 찾지 못했다. 다음으로 찾은 함양에서는 1년간 찾다 지금의 장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곳을 우연한 기회에 발견하고는 ‘이곳에서 시작해야 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변 경치도 좋을 뿐만 아니라 정 남향으로 햇빛을 많이 받을 수 있어 작물 생육에도 상당히 좋을 것 같았습니다.”그렇게 주변 토지 900평 가량을 사들인 후 주말에는 살 집을 짓고, 평일에는 통영에서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그가 건축 쪽 일을 하다 보니 직접 집을 지을 수 있었다. 그렇게 삶의 터전을 일군 후 2010년 9월 아내와 함께 함양에서 귀농의 꿈을 키워 나가기 시작했다. “솔직히 귀농을 후회한 적도 많이 있다. 몸이 너무 힘든 경우가 많다. 도시생활 할 때는 스트레스로 힘들었는데, 여기서는 몸도 힘들고 스트레스도 너무 많이 받는다.” 몸과 마음이 힘들다보니 부부싸움도 잦을 수밖에 없었다. 몸과 마음이 지쳤지만 귀농을 결심한 이후 그들에게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기에 힘들어도 이겨낼 수 있었다.   공명재씨가 처음으로 선택한 작물은 블루베리. 그러나 블루베리는 시설비 등이 너무 많이 들어 시작도 하지 못했다. 그에게 찾아온 첫 번째 시행착오였다. 무턱대고 작물을 선정한 이후 그에 맞춰 농사를 지으려 했기에 발생한 것이다. 그는 1년 동안 함양군에서 운영하는 농업인대학을 비롯해 정보화 교육 등 다양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농사 관련 전문지식이 전무한 그에게는 단비 같은 교육이었다. 또한 교육도 중요하지만 그에게는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농사꾼들의 노하우가 더욱 절실했다. 당시에는 텃밭농사부터 시작해 고구마 감자, 고추 등 조금씩이지만 다양한 작물을 심었다. 다음으로 시작한 작물은 오미자. 처음부터 친환경으로 시작한 농사는 그의 마음대로 따라주지 못했다. “완전 묵혔던 땅으로 거름기가 전혀 없었어요. 그것도 모르고 심어 놨으니 제대로 자랄 수가 있겠습니까.” 심은 지 제법 지났지만 키도 작고 새순이 오그라들고,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전문가들이 조언하기 시작했다. 잘라내고 새순이 자랄 수 있도록 조치를 해야 한다고. 어렵게 가꾸던 오미자를 잘라낼 수밖에 없었다. 다시 처음부터 작업이 시작됐다. 밑거름에 웃거름, 한여름 뙤약볕에 김을 매고. 그렇게 다시 2년을 가꿨다. 그리고 올해는 수확을 앞두고 영글기 시작한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렸다. “아직 수확철은 아니지만 자식 같은 오미자를 보고 있으면 벌써부터 설레기도 합니다. 귀농 이후 첫 수확이니 많이 고맙기도 하구요” 태풍 등 특별한 기상이변이 없는 한 올해는 얼마간의 수확은 이뤄낼 수 있어 뿌듯하기만 하다. 그는 “주렁주렁 예쁘게 달린 오미자를 볼 때마다 눈가와 입가에는 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라며 행복해 하기도 했다.바닷가에인 통영이 고향인 아내 민재씨에게는 아직도 농사일은 서툴기만 하다. 가끔 너무 힘에 부치면 친정집으로 탈출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곳이 삶의 터전이다. “물론 아주 많이 힘든 경우도 있지요. 그냥 가서 하면 되지 않겠느냐라는 막연한 생각만 가졌었는데, 이건 해도 너무 힘들어요.” 그의 가족들은 물론 부인까지 귀농에 대해 반대했다. “경제적으로는 힘들어도 ‘희망’을 가지고 즐겁게 생활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민재씨. “유기농 너무 어렵습니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닙니다.” 수십년 농사꾼도 어렵다는 유기농을 시작했지만 손이 너무 많이 간다. 김매기부터 시작해서 벌레잡기, 친환경 약재를 사용한 방제까지. “막상 농사를 시작하다보니 진짜 안 되는 것이 농사일인 것 같습니다.” 그는 귀농을 결심한 이후 무수히 농사 관련 책들을 읽었으며 그 중에서 전 세계적으로 유기농의 전문가로 알려진 ‘기무라 아키노리’의 책을 읽고 유기농을 결심했다. 귀농 4년차지만 그에게는 아직까지 안정적인 수입이 없다. 보통의 오미자농사는 2년이 지나면 수확을 할 수 있지만 그의 오미자는 올해부터 수확에 들어간다. 그동안 그의 아내가 일을 다니기도 하고, 그도 공사현장에서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작물과 자연, 그리고 주변 환경과 싸워야 합니다. 귀농을 결심한 이들은 시골생활을 즐기려고 오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뚜렷한 목표를 설정이 있어야 합니다.” 이들 부부의 다음 목표는 재배지역을 넓히는 것. 해거리를 하는 오미자의 특성상 현재의 규모로는 안정적인 영농이 불가능하다. 인근의 토지들을 수소문 하고 있지만 쉽게 농지를 팔거나 빌려주는 이웃이 없다. 얼마간은 외지인들의 소유로 남아 있고, 또 마을 주민들의 생계 수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또 오미자 가공시설을 준비하고 있다. 9월 한 달 정도 생산해서 판매하기에는 그 이후의 생계가 막막하기 때문에 가공시설을 만들어 오미자 엑기스와 효소 등을 만들어 판매해 꾸준한 수입원을 만들어 내겠다는 것이다. 이들 부부는 블로그(http://blog.naver.com/adam7720)를 통해 농산물 판매, 그리고 영농일기 등을 작성한다. “유기농을 한다고 하는데 소비자들이 믿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을 블로그에 기록해 놓습니다. 퇴비 주는 것, 제초작업 하는 것, 모두 보여드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소비자와의 신뢰를 쌓아가고 있다.공명재씨는 “귀농인들은 누구나 실패의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초반의 위험을 잘 극복하고 성공적인 정착을 이루어 낸다면 그다음에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기다리고 있습니다.”라며 희망찬 내일을 이야기했다.강대용 기자※ 이 취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 사업비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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