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박부동산 사장님, 요즘 좋은 물건 좀 나왔어용? 나 복하고도 부인이에용.” “헤헤헤, 우리 오드라 핼뻔 컨드 사모님? 몰라 뵈어서 죽을 죄 졌습니당. 요즘 강남 물 아주 좋습니다, 좋은 물건 많이 나왔습니당-. 하우스 푸어가 은행 이자 감당 못해 집 다 내놓고 거리에 나앉은 날이 오늘 낼이에용. 최고급 정보입니당.“호호호. 지들이 아무나 강남땅 사는 줄 알고 덤벼들었단 말이지? 분수를 모르고? 나 신사동 그 사람이나 만나러 가야지.”그렇다. 복부인 졸부들, 조금 배 아프지만 강남땅이 금싸라기 땅이라는 것은 옛날부터 증명된 사실이다. 서울 강남땅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렇다. 강남땅은 한강을 끼고 있다. 강북 강남을 가르는 이 한강이야말로 한반도 중부에 위치하여 남쪽으로나 북쪽으로나 중간에 위치해 있고 한강을 오가는 배를 이용하여 물자수송을 쉽게 할 수 있어 나라 다스리기가 편했다. 기름진 평야가 있고 특히 당항성(화성)이 있어 중국의 발달된 선진문물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요지가 한강이었다.한강을 차지한 나라가 로또 당첨으로 알려지자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이 한강을 두고 고구려 백제 신라가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제일 처음 차지한 나라는 백제다. 건국 초부터 한강을 먼저 차지함으로서 삼국중 제일 먼저 4C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근초고왕은 중국 요서, 산둥, 동진, 일본 규슈 등 서해 해상을 완전 장악하고 무역함으로서 장보고 이전에 이미 당대 최고의 해상왕국이 되었다. 이는 우리나라가 지금도 세계 제일의 조선 강국을 유지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구려 광개토대왕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5C 요동, 거란, 동부여를 정복한 후 남쪽으로 한강 이북까지 밀고 내려왔다. 아들 장수왕은 아예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기고 한반도 남쪽으로 눈을 돌려 남진정책을 폈다. 한강 이남을 차지하기 위하여 강하게 밀어부쳤다. 맞서 싸우던 백제 개로왕이 아차산성에서 전사하고 만다. 결국 황금의 땅 한강을 내어주고 웅진(공주)으로 쫓겨내려 갈 수밖에 없었다.  이에 위기를 느낀 백제와 신라는 나제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맞선다. 웅진(공주)에서 세 번째로 사비성(부여)으로 수도를 옮긴 백제 성왕은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고 대반격에 나서 한강을 되찾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신라 진흥왕이 누구였던가. 신라의 국운을 판가름하게 할 한강이 아니었던가? 러시아가 오매불망 얼지 않는 부동항을 차지하려 전 세계를 헤매며 고생하였듯이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으로 막혀 남동쪽 골짜기에 고립되어 있던 신라로서는 중국으로 직접 교역 할 수 있는 한강 진출이야말로 국운을 건 드림(Dream), 꿈, 꿈, 꿈이 아닐 수 없었다. 진흥왕은 백제와 맺은 나제동맹을 헌 신발짝 집어 던지듯 던져버리고 재빨리 한강을 먼저 차지하고 ‘여기는 내 땅’하고 선언해 버린 것이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한강을 빼앗긴 성왕은 신라를 총공격하였다. 그러나 그는 <관산성 전투>(554년)에서 날아온 화살을 맞고 비운의 전사를 함으로서 백제의 국운은 끝을 향하여 가고 있었다. 한강을 차지한 신라는 딩가 딩가 춤을 추었다.  결국 6C 진흥왕 때 가장 늦게 한강을 차지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이 한강을 차지한 강남땅 주인들은 토지문서를 작성했다. 토지문서가 몇 개 발견되었다. 그 중 가장 확실한 토지문서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릉비」다. 한강 이북을 차지한 내역이 자세히 비문에 새겨져 있다. - 호태왕(광개토대왕)이 위엄을 보이며 크게 노하여 아리수(한강)를 건너 군사를 보내어 성을 포위하니 백잔왕(백제왕)은 궁핍해져서 남녀 포로 1,000인과 세포 1,000필을 바치고 무릎을 끓었다.- 또한 그의 아들 장수왕은 충주에 <중원 고구려비>를 세워 한강 이남을 차지하였음을 등기해 놓았다. 삼국 중 가장 나중에 한강을 차지한 신라도 가만있을 수 없었다. 진흥왕이 한강 상류를 차지하였음을 선언하는 <단양 적성비>(551년)를 세웠고, 이어 한강 하류를 차지하였음을 증명하는 토지문서 「북한산비」가 발견되었는데(555년) 금석학의 대가 추사 김정희 이 비문의 내용을 밝혀냄으로서 「북한산비」가 진흥왕 네 개의 영토비 중 하나임을 밝혀내었다. 진흥왕은 이렇게 한강을 돌에 새겨 놓아 등기해 버렸던 것이다. 이처럼 한강은 우리나라의 젖줄이고 강남땅은 노른자 땅이 아닐 수 없었으니 땅값이 비싼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부자가 아니면 발을 붙일 수 없다. 그 이후 정도전이 구상한 한양 서울은 조선왕조 천년 수도가 됨으로서 그 진가를 증명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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