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의면 소재지에서 동북 방향으로 향하면 교북리가 나타난다. 마을에 들어서 길을 따라 가면 좌측으로 높다랗고 커다란 기와지붕이 보인다. 그곳이 바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26호인 안의향교이다.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안의 향교는 성종 4년 현감 최영(崔英)이 창건하였고 정유재란 때 화재를 입었다. 영조 5년 안의 현(縣)이 없어짐에 따라 폐지되었다가 1731년 현이 복원되어 다시 개교했다. 영조 12년 이성택, 최태희 등이 건의하여 중건하였다고 한다. 재천루(在川樓)의 문턱을 넘어 계단을 올랐다. 눈앞에는 강당인 명륜당(明倫堂)이 보였고, 좌우로는 화우재(化雨齋)와 출곡재(出谷齋)가 보였다. 그리고 명륜당 뒤 문묘인 대성전(大成殿)이 위치했다. 대성전 건물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돌 받침을 높게 쌓았다. 일반적으로 평지에 세워지는 향교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형식을 따른다. 하지만 평지에 세워진 안의향교는 일반적이 형식과는 어긋난 전학후묘의 배치를 택했다.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나무대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까치발을 하고 담 너머를 기웃거렸다. 커다란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은행나무, 행단(杏亶)이었다. 옛날 공자님이 행단에서 강학했다는 이야기가 있어, 학문을 닦는 서원이나 향교에서는 은행나무를 심었다. 선비들은 향교에 심어진 은행나무를 바라보면서 공자님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은행나무는 스승님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닐까. 커다란 행단을 바라보고 있으니 까만 얼굴 하나가 가슴을 밟고 지나간다.얼마 전 화재로 잃어버린 국보1호를 복원한다며 시끌벅적했다. 안타깝게도 숭례문 복원 공사는 아름답게 마무리 되지 못했다. 먼저 단청에서 박락이 일어났다. 숭례문이 부실공사라며 언론에서는 신나게 떠들어댔다. 그 중대한 공사를 맡은 단청장은 열 몇 살부터 평생 단청 일만 해온 분이었다. 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전통 기와, 전통 아교, 전통 목재······, 모든 것에 전통을 대입시켰다. 하지만 세상은 변해 있었다. 옛날보다 사람은 더 많아졌고 사람이 많아진 것만큼 공기의 오염도 늘어났다. 또한 전통의 방식보다 때로는 현대의 방식이 더 견고하고 오래가는 세상이기도 했다. 단청 박락의 원인은 전통이 현대의 물질과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아직도 숭례문이야기는 간간히 뉴스에 등장한다. 모두들 단청장에게 막 말을 던진다. 그러나 나만은 그러고 싶지 않다. 그 분은 나에게 단청을 가르쳐 주신 고마운 은사님이기 때문이다.단청을 배우러 서울에 갈 것이라 하니 누구는 “저것이 곧 머리를 깎고 중이 될 것이다”했고, 또 누구는 “저것이 곧 돗자리를 깔고 어느 공원에 앉아 있을 것이다”했다. 나 또한 불교미술을 배운다는 것에 큰 확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떤 운명 같은 것이었다.단청일이란 여자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운이 좋았다. 서울에 와서 홍선생님을 만났다. 그때는 아직 단청장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경복궁 단청공사를 하고 계셨다. 자연스럽게 단청 일을 배우게 되었다. 단청을 하면서 불교와 문화재에 대해 공부했다. 아마 내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일 것이다. 사람들이 나의 얼굴빛이 좋아졌다고 했다. 얼굴빛이 변한 것은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끔 친구들은 말한다. “너는 좀 특이해······”특이하게 산다는 것은 많은 말들을 달고 살아야 한다. 나는 특이한 나의 삶을 사랑한다. 내 삶을 사랑할수록 그때 인생의 변화를 가져오게 했던 은사님이 생각난다. 나에게 있어 커다란 행단이었던 은사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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