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왕이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 근초고왕이 한강을 차지하고 요서, 동진, 일본 규슈까지 무역을 하며 해상을 장악하여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었던 백제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전성기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예술이 무엇인지 아는 고품격 멋쟁이 나라였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7기) 중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과 왕비의 불꽃무늬 금관은 보는 이로 하여금 하늘로 비천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이처럼 정교하게 살아있는 듯한 생동감을 느끼게 하는 백제 장인의 손은 황금손이 아닐 수 없다.  내가 공주사범대학을 다니던 70년대 초 공주 석장리에서는 구석기 유적지가 발굴되어 역사학도들이 유물을 캐내느라 분주했었고 이어 송산리 고분군 배수로 공사 중 무령왕릉이 발견되자 역사학계가 발칵 뒤집혔다.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아 굴식 벽돌무덤을 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들은(108종 4600점) 백제 예술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무덤의 주인을 설명해주는 묘지석이 나옴으로서 백제왕의 계보와 년대 측정 등 백제사가 정확하게 정립되는 계기가 되어  백제를 재평가하는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그 당시 공주국립박물관은 공주 천주교 성당 아래에 단층으로 허름하기 그지없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대학생이던 나는 마음이 우울할 때 가끔 들어가 어두컴컴한 그늘 속에서 이천년을 두고 발하는 백제의 황금빛 금제 관식과 옥구슬과 토기들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아보던 기억은 잊을 수 없다. 백제는 한성(서울), 웅진(공주), 사비(부여) 순으로 서울을 3번 옮겼다. 무령왕이 각 지방에 22담로를 파견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성왕이 국호를 ‘남부여’라 칭하고 백제의 전성기를 또 한번 꿈꾸던 곳이 사비성(부여)이었다. 부여는 의자왕이 마지막 시대를 장식한 곳이다. 지금도 부소산성에 가면 삼천궁녀가 꽃잎처럼 떨어져 죽었다던 낙화암이 있고 고란사가 있고 백강(백마강)이 유유히 서해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 백제의 문화와 역사, 숨결이 느껴지는 부여국립박물관에 가는 것을 빼놓으면 안 된다. 그 곳에서 만나는 백제 최고의 걸작은 백제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백제금동대향로>다. 전체높이 64cm, 지름 20cm로 1993년 부여 능산리(陵山里) 고분군에서 출토되었다. 금동대향로는 봉황, 봉래산이 양각된 뚜껑, 연꽃잎으로 장식된 몸통, 용받침의 4개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뚜껑의 꼭지 위에 있는 봉황은 꽁지를 쳐들고 날개를 활짝 펴고 있으며, 그 밑으로는 5인의 악사(樂士)가 둘러 있고, 다시 아래로는 74개의 산이 중첩되어 있다. 몸통에는 우아하고 정교한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한 마리의 용이 입을 바닥 중심에 붙이고 몸을 틀어 내려서 받침을 이루고 있다. 고구려의 사신도와 백제의 산수무늬벽돌과 백제금동대향로. 이 세 유물은 도교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자연숭배사상과 신선사상으로 내세에서 유유자적 신선으로 부활할 것을 믿고 무덤 속에 이러한 유물들을 놓아두었다.특히 백제는 동양 최대의 사찰을 가지고 있다. 서동과 선화공주로 잘 알려진 백제 무왕이 지은 미륵사의 <미륵사지 5층 석탑>은 목조탑에서 석조탑으로 전환되던 시기에 만들어진 석탑으로 돌도 날아갈 듯이 새겨놓은 그 세련미에 놀라울 뿐이다. 정림사지 5층 석탑도 경쾌함이 그지없다. 또 백제마애불로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 있다. 가운데 부처님을 보면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옆집 할아버지가 나를 보고 웃는 듯한 인자한 모습에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저절로 꾸벅 절하며 웃지 않을 수 없는 온화함이 배어있다. 그래서 역사가들이 그 마애상을 ‘백제의 미소’라고 이름 붙였다.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가 일본에 많은 문화와 문물을 전해 주었다. 그 중에서도 백제는 일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나라다. 전해주지 않은 문화가 없다. 가령 일본 고류사에 있는 <목조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을 보면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백제, 신라의 반가사유상이 금동으로, 일본의 것은 나무로 되어 있다는 재료만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 모양은 붕어빵처럼 똑같다. 어찌 이럴 수 있을까. 백제의 노리사치계가 일본에 불교를 전래하여 준 것으로 보면 백제의 영향을 받아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금동 반가 사유상의 온화하고 신비하고 그윽한 미소와 미의 극치는 비교가 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백제는 확실히 미를 아는 나라였다. 세공 하나하나에 백제의 숨결이 숨어있음을 볼 수 있다. 고구려가 남자의 나라라면 백제가 우아하고 멋스럽고 팔등신의 아릿다운 여인의 나라 같다고 생각되어 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백제의 미’  여럿 중에서 뛰어난 것을 ‘백미’라 하듯 백제는 예술은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은은히 우아하게 고품격으로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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