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유식하게 INCHOEN INTERNATIONAL AIRPORT TERMINAL.(인천국제공항 대합실) “고인돌 여행사 얼짱 양 입니다. <얼짱 한국사 탐험대> 여러분들은 탑승 출구 100번 앞으로 잽싸게 빨리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여행사 유니폼을 입은 아가씨가 핸드 마이크로 회원들을 집합시켰다. “나 얼짱 문쌤이다. 이제 우리는 역사적인 대탐험을 하러 머나먼 중국으로 출발한다. 출발 시간이 조금 남아 1시간 사전 보충 수업하겠다.” “예? 머나 먼이 아니라 제일 가까이 붙어있는 중국인데요. 비향기가 아니라도 배타고 걸어서 갈 수 있는데요? 또 인터내셔날 공항에서 보충수업 공부를 한다는 그 말쌈은 무슨 쌈이에요? 국제적 망신 말해 드려요?” “그렇다. 앉으나 서나 학생은 공부를 해야 학생이다. 공자님 왈 학이(學而)가 시습지(時習之)하면 불역(不易)이 열호(悅乎)라 하셨다.(배우고 익히면 그 아니 기쁘지 아니한가.)” “에구구, 갈수록 뚱딴지 말쌈만 먹이는군.” “오늘 우리가 가는 곳은 우리 선조의 땅, 고구려다. 1875년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서 한 농부가 광개토대왕릉비 [廣開土大王陵碑] 발견했다. 그 비석엔 우리나라의 어마어마한 토지(영토)가 등기되어 있었다. 우리 호태왕 할아버지께서 지혜롭게 몇 천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게 돌에 새겨놓은 땅문서가 발견되었으니 우리가 당장 달려가 토지대장 원본을 열람하는 것은 당연지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자, 고고에 고고하여 고조할아버님 광개토대왕님을 만나러 집안현으로 오늘 우리는 간다.” 비행기 쓩 쓩! “쌤님, 여행 안내서에 보니까 최초로 ‘영락(永樂)’이라는 독자적이며 자주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고 쓰여 있는데 연호가 뭐에요?” “연호(年號)는 군주국가에서 쓰는 기년법(紀年法)이다. 햇수 계산법으로 ‘영락 10년에 신라왕의 요청으로 기병과 보병 5만을 보내 신라에 침입한 왜구를 궤멸하였다.’(광개토대왕릉 비문) 하면 영락 10년은 대왕이 즉위한 10년째를 말하므로 AD 400년임을 계산 할 수 있는 기준법을 ‘영락’으로 정했다는 말이다. 18세의 젊은 나이로 왕에 오른 광개토대왕은 대규모의 정복사업을 통하여 일생 64개 성과 1400개의 촌을 점령하였다. 이름 그대로 너를 광(廣), 열 개(開),땅 토(土), 즉 넓은 땅을 열어 논 대왕이었다. 요동 서로는 후연을, 북으로는 비려(거란), 동으로는 숙신(여진), 동부여를 정복하여 만주 전역을 지배하고, 남으로는 한강 이북을 복속시키고 신라를 침입한 일본도 ㅤㅉㅗㅈ아내었다고 새겨놓았으니 바로 이것이 무엇이냐? 돌로 새겨 놓은 그야말로 광활한 옛 영토 우리 땅의 토지문서가 아니겠느냐.” 고인돌 안내양 “나도 안내양 10년 끝발로 유식하게 한 말씀 보태면 여기 보시는 이 광개토대왕릉비는 장수왕이 414년에 아버지 광개토대왕을 기려 만든 것으로 높이가 6.39m입네다. 왕릉비 4면에는 예서체로 된 44행으로 된 총 1775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뒤쪽 면에 고구려 추모(주몽)왕의 신이한 출생 건국담에서부터 광개토대왕까지의 왕의 족보가 적혀 있고, 한쪽엔 왕의 영토 확장의 주요 내용이 년도 별로 기록되어 있고, 또 한쪽엔 왕의 묘를 수호 관리하는 묘지기(수묘인)에 대한 기록이 있습네다. 하지만 140여 글자가 이빨 빠지듯 마모 훼손되어 있어 그 내용의 해석을 두고 여러 가지 이견을 나타내고 있는 실정입네다.” 탐험대원들은 비석을 보기는커녕 모두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말하는 아름다운 처녀 고인돌 안내양을 침 흘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광개토왕릉비의 해석을 놓고 우리나라와 일본은 첨예한 역사 싸움을 벌이고 있다. 광개토대왕릉비에 새겨진 「백잔신라구시속민 유래조공 이왜이신묘년래 도해파백잔 □□신라 이위신민」를 놓고 왜를 주어로 놓고 해석하는 경우와 고구려를 주어로 놓고 해석하는 경우를 놓고 백제 신라와 왜 중 어느 나라가 속민으로서 조공을 바쳐 왔느냐를 따지는 것인데 일본은 이를 근거로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웃지 못 할 어처구니없는 역사왜곡을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으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또라이 일본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이 광개토대왕릉비는 누가 세운 누구의 비석이란 말인가? 고구려 20대 왕 장수왕이 19대 왕 광개토대왕 아버지의 업적을 기려 세운 비이다. 그런데 일본은 은혜를 악으로 갚는다. 일본이 백제와 신라와 가야를 점령하고 속국으로 두고 조공을 받았다고 해석하는 「임나일본부설」의 주장을 보면서 바로 그래서 광개토대왕릉비의 토지 문서가 얼마나 중요한 사료인가를 통감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자라나는 청소년 세대에게 진실의 역사를 배우도록 가르쳐야 할 것이다. 선택이 아니라 필수로 가르쳐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다. - ‘한국통사’ 박은식 -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