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계서원과 정여창 고택 답사기 국립부여박물관의 역사문화아카데미 답사여행의 일환으로 2013년 11월 6일 경남 함양에 다녀왔다. 처음으로 가 보는 고장이지만 낙동강을 중심으로 좌 안동. 우 함양이라 일컫는다는 영남사림의 본고장이 함양이라는 안내자의 차내 설명에 기대와 호기심이 일었다. 오늘의 일정은 함양이 낳은 조선조 성리학의 대두인 일두 정여창 선생이 봉행된 남계서원과 함양군 지곡면 개평에 있는 선생의 고택을 답사하는 것이다. 부여에서 한 시간 넘게 달려 지리산 자락의 고풍이 고즈넉히 서린 함양에 도착하였다. 1. 상림과 남계서원 우리가 먼저 찾아간 곳은 신라 진성여왕 때 조성되었다는 상림이다. 당시 이곳 천령군(함양군의 옛이름)의 태수로 고운 최치원 선생이 부임하여 보니 지금의 위천수가 범람하여 홍수 피해를 자주 입음으로 강변에 둑을 쌓고 그 제방을 따라 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한 것이 오늘날의 상림이라고 한다. 고금의 위정자의 큰 덕목중의 하나가 치수사업인데. 당대 최고의 석학인 최고운 선생이 조성한 상림이 오늘까지 잘 보존된 것은 함양 군민의 큰 복이라 여겨졌다. 요즘에도 여러 가지 말이 많은 4대강 사업이 상림처럼 천여년 후에는 어떤 평판과 모습일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공원을 걸으며 들었다. 때마침 가을단풍으로 절경인 상림공원을 지역주민들이 많이 찾아 걷고 있는 모습에 건강과 휴식을 위한 좋은 장소로 여겨졌다. 조금 더 걸으니 나의 외가인 파평 윤씨의 정자가 있어 반가웠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경험은 공원 안의 연리목을 본 것이었다. 연리목이란 수종이 다른 두 그루의 나무가 함께 붙어서 자라는 나무로. 이곳에는 느티나무와 다른 나무가 마치 한 나무처럼 공생하여 고목이 된 것이 무척 신기했다. 그것도 두 그루나 보았다. 이 고장 사람들은 이성들이 서로 사랑을 나누는 사랑의 상징으로 사랑나무 라고 한다는데 그럴듯하였다. 상림공원을 떠나 인근에 있는 남계서원에 도착하였다. 전통향교와 서원의 양식대로 입구에 홍살문과 하마비가 우뚝 서 있는데 이를 옆구리로 버스가 무례히 통과하여 주차장에서 하차하였으니. 예 같으면 불경죄로 곤장을 여러대 맞을 일이나 주차장이 안에 있으니 어찌할 것인가? 안내화보의 사진을 보니 전에는 입장객이 하마비와 홍살문을 통과하여 서원에 입장하도록 되었던데. 가급적이면 이처럼 옛 정서를 살려서 주차장을 합리적으로 배치함이 조상을 공경하고 서원을 존중하는 오늘의 후세인의 예의가 아닐까 하고 생각 해 본다. 남계서원은 앞에 흐르는 남계천을 임수로 하여 함양군 수동면에 1552년(명종7년)에 건립되었다. 이 서원은 조선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사액서원(임금이 서원의 이름을 지어 하사한 서원)으로서 일두 정여창선생과 개암 강익. 동계 정은선생 세분을 봉행 한 서원이다. 참고로 향교와 서원의 다른 점을 설명하면. 향교가 국가에서 운영하는 공교육기관으로 양반과 평민을 가르쳤다면. 서원은 주로 양반자제들을 가르친 사립학교라는 점이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정여창선생의 일두라는 호 이다. 일두란 ‘하나의 좀벌레’란 뜻으로 자신을 미물로 낮추며 겸양하는 조선선비의 고결한 품성이 그분의 호에도 잘 나타나 있다. 정문인 풍영루는 조선서원의 풍채를 잘 보여주는데. 이층의 누각에 오르니 서원의 경내가 한눈으로 조망되며. 선생이 좋아했다는 연꽃의 문양이 난간과 그림에 장식되었고 천장에는 대들보와 서까래의 봉합점을 애교 있게 가린 눈꼽쟁이 천장도 양쪽에 있다. 거기서 안뜰을 보면 정방형의 연못이 좌우로 있고 그 위에 동재(애련헌)와 서재(영매헌)가 있어 유생들이 이곳에서 지내며 학문을 닦고. 마루의 쪽문을 열어 눈아래 연못의 연꽃을 관상하는 설계로 지었으니 그 심미적 안목이 참으로 아름답다. 그 위로 강당인 명성당 옆에는 배롱나무(백일홍 또는 간지럼나무)가 여러그루 감싸고 있는데. 이 나무는 자신의 껍질을 모두 벗어버리는 수종으로 가식없이 자신을 모두 드러내는 조선선비의 품성을 상징하고. 일편단심 붉은 꽃을 석달열흘 간이나 오래 피우므로 선비들이 선호하여 많이 심는다고 한다. 명성당 대청마루 좌우의 방에는 진사시를 준비하는 유생과 진사시 합격 후에 성균관 입학이나 과거를 준비하는 유생들의 방으로 구분하여 배치하였다 한다. 명성당 뒤편으로 급경사 진 계단을 오르면 세 분을 모신 사당이 있다. 이곳에도 일두 선생께 잔을 올리는 술잔 받침대와 제자인 개암. 동계 선생께 올리는 술잔 받침대가 따로 있으니 그 서열의 엄정함을 이로써 느낄 수 있었다. 사당 언덕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멀리 보이는 남계천과 남계서원이 하늘에서 보는 것처럼 부감하여 보인다. 2. 일두 선생과 그 고택 남계서원을 떠나 지곡면 개평마을에 있는 일두 선생의 고택으로 이동하였다. 일두 정여창 선생은 1450년(세종32년)에 함양군 지곡면의 개평마을에서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8세때 부친 정육을이 이시애난의 진압군으로 참전(세조13년) 했다가 전사하였다는 소식에 그는 전쟁터인 함경도로 달려가 부친의 시신을 수습. 운구하여 선산에 모시고 3년간 시묘하면서 자식의 효를 다 하였다. 27세에 상경하여 당대의 석학인 김종직 문하에서 김굉필 등 유생들과 함께 사사하면서 도학수련에 전념하였다. 선생은 학문연마 에만 전념하다가 모친의 권유로 34세에 사마시험에 응시 하여 급제하고 벼슬을 사양하다가 40세에 예문관 검열에 보직 되었으며 41세(성종21년)에 왕세자인 연산군을 가르치는 시강원의 설서가 되었다. 45세에 외직을 자원하여 향리인 안의현감으로 부임하여 왕도정치 실현에 진력하였다. 이때에 그의 모친이 돌림병인 장질부사(장티프스)에 감염되어 사경을 헤맬 때 아무도 전염을 두려워하여 간병을 꺼렸으나 일두선생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않고 두달동안 혼자서 지극정성으로 간병하여 모친을 완치 시켰다. 하루는 그의 모친이 외양간에서 뛰쳐나온 왕소가 안채에 뛰어들어 그분에게 달려들므로 이에 크게 놀랐다 한다. 그 후로 선생은 이에 크게 상심하여 여생에 쇠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하니 지극한 효성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그 후에 선생은 성종이 서거하고 왕위에 오른 연산군에 의하여 야기된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함경도 최북단의 종성에 유배되어 귀양살이를 하다가 55세(연산10년)에 그곳에서 사거하였다. 자신에게서 직접 사사한 연산군에 의하여 유배되어 관청에서 나무하고 불때는 화부로 노역하다가 사거하였으니 얼마나 기막힌 노릇인가? 일두선생의 서거소식을 들은 제자들은 종성에 가서 2개월동안 시신을 함양으로 운구하여 수동면 승안산에 모시고 안장하였으니 그 스승을 숭모하는 제자들의 덕행을 가히 짐작할만 하였다. 연산군 퇴위 후 중종 2년에 선생은 도승지로 추증 되었으며. 중종12년에 다시 대광숭록대부 우의정으로 증직 되었다가 명종7년에 남계서원에 봉행되었다. 선생이 유학을 발전시킨 후과는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더불어 동방5현에 선정되어 조선종묘사당의 문묘에 종사되었음에도 증명되었다. 일두 선생에 대한 일대기를 홍보관에서 얻은 안내서로 읽는 동안 버스는 날렵하게 잘 지은 지곡면사무소를 지나 일두 고택이 있는 개평마을에 도착하였다. 조선조 5현의 한분인 문헌공 일두 정여창선생의 고택은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마을에 있으며. 이 건물은 조선조 초기에 건축된 것을 선생이 타계한지 1세기 후에 후손들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이 고택은 3000 여평의 대지에 한옥 12동 규모의 건물이 배치된 목조 기와집으로 남도지방의 대표적인 양반가옥이며 국가지정 중요 민속자료로서 대한민국 대표한옥 10선에 뽑힌 집이다. 솟을대문에 들어서니 다른 고택과 달리 충효정려 편액 5점이 대문 서까래 아래에 걸려있다. 일두선생 조부의 편액이 맨 위에 걸려있고 아래쪽 4개는 후손들의 편액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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