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면 엄천 마을 앞에는 커다란 비석이 서 있다. 처음 그곳을 지났을 때는 눈 여겨 보지 않았다. 커다랗게 새겨져 있는 글귀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공원의 이름이 적혀있으려니 생각했다. 그날은 남편이 큰소리로 비석의 글귀를 읽었다. “점필제(佔畢齊) 김종직(金宗直) 선생 관영(官營)차밭 조성터(造成址)” 그것이 무엇이 길래 비석까지 세워져 있는 것일까? 궁금한 마음이 생겼다. 차밭을 둘러보기 위해 자동차에서 내렸다. 구경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자동차가 “쌩”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소리는 정물처럼 가라앉아 있던 것들을 총총히 일으켜 세웠다. 차나무가 가볍게 흔들리며 파르르 소리를 내었다. 봄 햇살 아래 조그마한 정자가 있었다. 느티나무가 그 곁에 서 있고 그 위에 까치집이 두 개 이웃해 지어졌다. 나는 봄 햇살을 맞으며 정자에 앉았다. 새소리가 조그맣게 들리고 꽃향기를 묻힌 봄바람이 코끝을 간지럽히며 지나갔다. 조그맣고 오래된 정원에 홀로 있는 느낌이었다. 모든 것은 인연이 있어야 귀와 눈에 들어오는 모양이다. 아마 묵은 세월 속에서 차밭과 내가. 김종직 선생과 내가 옅은 인연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관영차밭. 목민관이 군민의 세금 부담을 줄이려 만든 밭이었다. 오랜 옛날. 차가 흔하지 않던 시절 정말 애지중지 했던 차밭이었을 것이다. 허나 요즘은 차가 흔한 시절이다. 물론 차를 세금으로 바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다. 그래서 일까. 차밭은 자그마하고 초라했다. 그리고 사람의 발길에서 멀어진 듯 보였다. 조선시대. 차가 생산되지 않는 함양군은 해마다 임금에게 차(茶)를 바쳐야 했다. 백성들은 할 수 없이 전라도에 가서 비싼 돈을 주고 차를 사왔다. 쌀 한 말을 가져가면 차 한 홉을 살 수 있었다. 그것은 큰 부담이었다. 김종직 선생은 함양군수로 부임해 온 초기에 그 폐단을 발견하고는 고민에 빠졌다. 처음에는 차 공물을 백성들에게 부담시키지 않고 군의 돈으로 사서 바쳤다. 그러던 어느 날 ‘삼국사(三國史)’를 열람하다 신라 때 당나라에서 차의 종자를 얻어다가 지리산에 심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함양이 이 지리산 밑에 있으니 어찌 신라 때 남긴 종자가 없겠는가?” 선생은 몸소 여러 늙은 노인들을 찾아다니며 차에 관해 물었다. 이곳저곳을 수소문한 결과 엄천사(嚴川寺) 인근 북쪽 대숲에서 몇 그루의 차나무를 발견했다. 그곳을 땅 주인에게 사들인 뒤 관전(官田)으로 차밭을 만들었다. 몇 년 뒤 정성으로 가꾼 차나무는 무성해졌다. 마침내 차세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고 한다. 사람에게는 힘겹게 사는 사람을 돌아보는 어진마음이 있다. 이것을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 한다. 바로 사랑의 마음이다. 바라보는 풍경에는 차나무만 심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목민관의 측은지심이 함께 심어져 있었다. 세금의 부담이 줄었으니 백성은 행복했을 것이 분명하다. 작은 꽃망울에 순박한 백성들의 환한 얼굴 어리어 있는 듯 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차밭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소문나지 않은 것이 신기했다. 우리는 모두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좋은 음식을 먹고 비싼 옷을 입어도 생각만큼 행복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럼 행복의 조건은 무엇일까. 나는 사랑이라 믿고 싶다. 사람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거미줄처럼 서로가 서로를 끈끈히 붙잡아 주며 살아가야 한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 주는 것. 그것은 바로 측은지심 혹은 사랑일 것이다. 사랑은 메아리다. 내가 사랑의 마음을 보내면 사랑은 반드시 돌아온다. 사람을 사랑 하고 사랑 받는 그 순간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온몸에 사랑이 가득 차게 되면 비로소 사람들은 ‘아! 행복해’하고 중얼거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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