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누구에게도 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언제든지 남을 가르치려고만 한다. 물론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 공부도 많이 했고. 세상 물정도 잘 알아서 처신을 얼마나 잘 하는지 모른다. 그런데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자기가 어리석다는 것을 알고 늘 조심하며 겸손하게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어디를 가든지 상석(上席)에 앉는 것 보다는 말석(末席)에 가서 앉는 것을 좋아한다. 자신은 늘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열심히 배우려고 한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지 남의 가르침에 대해서 마음을 열고 잘 받아들인다. 과연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일까? 성경에서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씀이 있다. 서울에 가서 지하철을 타고 다니다 보면. 가끔 당황스런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도를 아십니까?”라고 말하면서. ‘재주가 있어 보이십니다. 신수가 훤하십니다. 얼굴을 보니까 앞으로 큰일을 하실 분 같습니다.’라는 말로 접근한다. 그들이 말하는 ‘도’라는 것은 무엇일까? 한자어(漢字語)에서 말하는 ‘도’(道)는 ‘진리’를 말하는 것인데. 기독교의 진리는 다분히 역설적이다. 어려운 말로 패러독스(paradox)라고 하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누가 너에게 억지로 5리를 가자고 하면 기꺼이 10리를 동행해 주어라! 누가 너에게 겉옷을 달라고 하거든 속옷까지 벗어주어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도 돌려대라!’는 것이다. ‘남들은 다 넓은 문으로 들어갈지라도 너희들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이 말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다. 상식적으로는 볼 때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이다. 기독교에서는 이러한 삶의 원리를 ‘십자가의 도’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처럼 보이지만. 구원을 받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런 면에서 교회는 기꺼이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집단이다. 교회는 원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타인에 대한 배려는 필수적이다. 더 나아가서 세상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세상 사람들은 종교를 떠나서 각자마다 자기주장이 다르고. 누구든지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세상에서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자기의 철학과 신앙을 주장하기 위해서 배타적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타종교를 비방한다든지 그들과 아예 담을 쌓고 살려고 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오히려 예수님처럼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한다. 그것이 세상이 원하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이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전하는 것을 꺼려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님을 죽였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로마 문화권에 있는 헬라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을 어리석은 짓이라며 비웃기까지 했다. 자기들의 철학이나 이성. 지식과 상식으로 볼 때 기독교처럼 미련해 보이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판에 뛰어드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정말 사심 없이 군민을 위해서 일할 사람이 누굴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겉으로는 그럴 듯한 장미 빛 공약을 내세우고 있지만. 각자의 종교를 떠나서 진정 ‘십자가의 도’를 실천할 사람이 누구인지 따져보아야 한다. 우리는 ‘섬김의 리더’를 만나고 싶은 것이다. 이번에는 자신의 명예와 욕심을 떨쳐버리고. 끝까지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 곁을 지켜줄 수 있는 그런 지도자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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