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말에 무턱대고 지리산 종주를 시작했다. 당시 등산에 대한 아무런 지식 없이 오로지 종주라는 목표를 일념으로 출발한 것이다. 12월의 지리산은 그저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 어느 누가오던 간에 한결같이 인자한 모습으로 반겨주었다. 그런데 아무런 준비 없이 간 탓인지 추위와 근육통에 굴복하여 급하게 연하천대피소에서 제일 빨리 내려갈 수 있는 마을로 하산하였다. 그리고 4년 후 공모전 활동으로 다시금 함양을 찾았을 때 저번에 우연히 하산했던 마을이 바로 함양의 음정마을임을 그제 서야 알게 되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이렇게 함양에 다시 오게 되어 왠지 옛 고향이 떠올랐다. 올해 6월 달부터 매달 환경부지정 생태마을을 방문하고 홍보하는 일환으로 함양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첫 출발부터 퍼즐이 잘 맞은 것이다. 먼저 방문한 생태마을은 앞서 4년 전에 하산했던 음정마을이다. 음정마을을 가기 전 마을이장님과 연락이 되지 않아 인터넷 자료만을 가지고 마을을 조사하려했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마을이장님과 입구에서 우연히 만나 마을의 전통과 자연생태. 명소를 소개 받을 수 있었다. 음정마을은 해발 600M에 위치하여 북쪽에는 삼정산이. 남쪽에는 지리산이 자리 잡고 있어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마을이장님께서 지리산 종주능선에 올라가는 길 중에 음정마을로 올라가는 것이 가장 수월하다고 하셨다. 그 말을 듣고 따로 시간을 내어 음정마을 코스로 연하천을 다시 올라가봤다. 나는 매년 지리산을 2회 정도 종주를 하고 있는데 확실히 화엄(형제봉)사. 백무동으로 올라가는 길보다는 덜 힘들었으며 다음번에 가족과 함께 올라오더라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연하천대피소에서 벽소령대피소를 가는 중간 즈음에 형제봉이라는 큰 바위가 하나 있다. 나도 물론이고 대부분이 그냥 기념사진만 찍고 지나치는 곳이다. 하지만 그 바위에 얽힌 전설을 마을 이장님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나무꾼과 선녀의 전래동화와 비슷하다. 아미라는 선녀가 두 아들과 지아비를 버리고 하늘로 올라가 남은 아들과 아비가 하늘을 향해 돌아오지 않는 아내를 기다리다가 화석이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부 어르신들은 형제봉이란 이름대신 부자(父子)바위라고 부르고 계신다. 1976년에 선유정이라는 정자를 세우고 실제 제사까지 지냈다고 하니 그 의미를 알고 보면 그저 큰 바위로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올라간 등산코스는 백무동으로 하산하였는데 보통 큰 산을 올라가면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것이 더 힘든 것이 보통이다. 내려가도 내려가도 끝은 보이지 않고 무릎은 아프고 보이는 경치는 똑같을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무동 하산 길은 달랐다. 내려가면서 보이는 경치는 정말이지 눈을 뗄 수야 뗄 수가 없게 만들었다. 맨 위에 있는 한신 폭포는 세석에서 조금만 내려오면 보이는데 최상류 폭포지만 요염한 물줄기와 힘 있는 소리에 내려가다 말고 폭포를 감상했다. 그리고 내려오는 내내 이쪽저쪽에서 합쳐지는 계곡과 이름 모를 폭포소리에 마음에 있는 모든 짐과 걱정이 깨끗이 쏵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폭포소리가 사방에서 입체적으로 내 귓가에 들려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백무동으로의 기분 좋은 하산을 마무리 했다. 나중에 백무동으로 내려온 기억이 너무 인상이 깊어 캠핑 장비를 챙겨 백무동 야영장에서 하루를 보냈다. 당시 비가 많이 와 고생을 한 기억이 있지만 지금은 그 빗소리마저 아련한 추억으로 다가온다. 음정마을 다음으로 오현마을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오현마을 근처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있는데 마을 주민 분들께서 어디서 왔냐고 물으셔서 부산대에서 왔다고 하니 부산대에서 지금 농활을 하고 있다며 학생들을 소개시켜주셨는데 그게 또 같은 학과 후배인 것이다. 이렇게 함양에 갈 때마다 새로운 우연이 하나씩 생기는 것 같다. 오현마을에 갈 때는 이장님과 사전에 연락이 된 탓에 도착하자마자 마을에 대한 설명과 오현마을의 주 특산품인 곶감을 설명해 주셨다. 오현마을 곶감은 전국적으로 유명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고 하는데 방문했던 시기가 곶감 철과 맞지 않아 다음번을 기약하고 일어섰다. 이장님께 간단한 설명을 듣고 근처의 선비탐방로를 가보았다. 선비의 고을답게 함양을 돌아다닐 때마다 많은 정자를 볼 수 있었는데 과거 영남에서 한양에 과거를 보러 떠나는 유생들이 덕유산 육십령고개를 지나던 길목으로 선비탐방로의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정자에 앉아 시원하게 흘러내리는 계곡을 바라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잔잔해짐을 느낄 수 있다. 이 때문에 함양을 갈 때 되도록 선비탐방로를 들려 소위 힐링이라 부르는 마음의 평온을 찾고 간다. 그리고 정자에서 잠시 머물렀다면 나무 데크로 설치된 길을 따라 걷게 된다. 계곡의 시원한 바람과 산새지저귀는 아름다운 새소리가 한결 나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준다. 특히 여름과 달리 가을에 동호정 앞에 있는 너럭바위에 누워 계곡물에 내려오는 단풍잎을 보고 있으면 여기가 무릉도원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된다. 이날 이후에도 함양 산삼축제에 참가하기위해 들렀다. 함양은 전 지역이 게르마늄토양이 분포되어있어 산삼이 특히 유명하다고 들었다. 우연히 축제를 진행하는 사회자분이 내는 문제를 맞춰 산삼을 선물로 받았는데 이 귀한 것을 본인이 먹기 아까워 다음날 부모님의 건강을 위해 드린 기억이 있다. 이렇게 올해 함양을 총 5번 방문했다. 방문할 때 마다 언제나 새롭게 맞아주는 함양은 마치 앞서 말한대로 따듯하고 정겨운 고향집을 생각나게 한다. 겉만 비대칭적으로 성장한 도시에서의 생활은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현대사회에 많은 문제들을 봐도 그러하다. 이들은 이유 없는 경쟁을 하고 여유 없이 생활을 한다. 나도 함양을 방문하기 전에는 이러한 삶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했었다. 단순히 뒤쳐진다는 이유로 삶의 여유를 갖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함양을 찾아와보고 매달 방문할 때 마다 얻을 수 있는 여유로움과 마음속의 풍만함은 결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특히 인간의 때를 묻지 않은 함양의 자연생태는 그 가치를 더욱 향상시킨다. 어딜 가든 흙을 밟을 수 있고 시원한 물과 상쾌한 바람. 거기에 초록수풀까지... 어쩌면 우리가 회귀해야할 최종장소일지도 모른다. 함양에 와서 이러한 많은 생각을 하니 결과적으로 한층 더 성장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내가 많은 이들에게 함양을 추천하는 이유이다. 함양에서 나를 함양하다... 조선시대 유생들이 과거를 보러 함양을 지나갔던 여운이 아직 남아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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