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덕유산에서 발원한 금천이 서상. 서하로 흐르면서 기이한 바위와 담. 소를 만들었다. 그곳을 화림동 계곡이라 부른다. 오래전에는 팔담팔정(八潭八停)이라 하여 8개의 못마다 하나씩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함양에 정자가 많았던 이유 중 하나가 무오사화 때문이다. 사화 이후 영남의 선비들은 중앙 진출에 배제되었다. 그래서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정자를 짓고 시서를 논하며 풍류를 즐겼다. 내가 거연정을 처음 만난 날은 화려하게 추운 겨울날이었다. 먼지처럼 하늘에 눈가루가 난분분 흩날렸다. 물론 바람도 세차게 불었다. 서하면 봉전마을을 지날 때 도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검은 기와지붕이 보였다. 무연히 차를 세우고 그곳에 가고 싶었다. 도로 약간 밑으로 난 소롯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먼저 눈바람이 앞장을 섰다. 좁다란 길이 끝나는 곳에 자그마한 다리가 보였다. 다리 건너에는 오래된 흑백사진의 한 장면처럼 검은 누각이 서 있었다. 마치 바위에 내려앉은 한 마리 검은 학 같았다. 어린 시절 보았던 고향의 풍경처럼 아련한 정겨움이 느껴졌다. 다리를 건넜다. 혹시라도 날개를 펴고 날아가 버릴까봐 조심스럽게 오래된 풍경 속으로 들어갔다. 정자는 겹처마에 합각지붕형식으로 하천 내에 지어졌다. ‘거연정’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었다. 경남 유형문화재 제433호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중층 누각 건물로 내부에는 별체(뒷벽)를 판재로 구성한 판방을 1칸 두었다. 기둥의 높이를 맞추기 위해 주초를 사용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다. 기둥은 모두 원주(圓柱)이며. 누하주(樓下柱)는 직경이 큰 재목을 틀어지거나 울퉁불퉁한 채로 대강 다듬어 사용하였다. 고려 말기 전오륜(全五倫)의 7대손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전시서(全時敍)가 1640년경 서산서원을 세우고 그 곁에 억새로 정자를 지어졌다. 1640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서원은 훼손되었다. 1872년 전시서의 후손이 억새로 된 건물을 철거하고 서원의 재목으로 다시 거연정을 세웠다. 긴긴 세월에 화재와 상처를 입으며 예전의 모습은 사라지고 19세기 말에 또 한 번 중수되었다. 사위는 고요했다. 마루에 앉아 주위를 휘 둘러보았다. 깔끔한 마루는 누군가가 쓸고 닦는 것일까. 바닥이 반질반질 윤기가 났다. 대체로 물건이란 사람 손이 많이 닿으면 닿을수록 닳고 허물어진다. 그런데 사람이 머무르는 정자나 집은 그렇지 않다. 사람의 손이 자주 닿아 닦아주고 만져주면 반짝반짝 빛이 난다. 신기하게도 사람의 발길이 뚝 끊어지면 시나브로 허물어져 버린다. 마치 사람과 함께 숨 쉬는 물건 같다. 여름철 도랑도랑 소리를 내며 흘렀을 물줄기는 하얀 얼음을 물고 침묵하고 있었다. 무채색의 계절에 푸른 소나무도 보였다. 소나무는 암벽 속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왜 두터운 땅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저 바위틈에 자리를 잡은 것일까. 그곳이 바로 자신이 서야하는 자리라는 것을 알았던 것일까. 척박한 환경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소나무는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거연정도 수많은 풍파를 겪으며 허물어지기를 반복하며 지금의 모습으로 살아남은 것이다. 그냥 아무 일 없이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자도. 나무도 그리고 사람도······. 모두. 삶이란 수많은 풍파를 겪은 다음에야 저렇듯 편안한 모습을 갖는 것인 듯 느껴졌다. ‘자연에 내가 거하고. 내가 자연에 거하니······’라는 안내문의 구절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 순간 나와 자연이 하나였다. 어쩌면 자연이란 모진 시련 속에서도 억척같이 살아남아 스스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산한 겨울바람이 나를 흔들며 지나갔다. 다시 바람이 앞장을 섰다. 오래된 풍경을 남겨두고 다시 화림교를 건넜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