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기회에 함양군에서 테마 여행기를 공모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몇 년 전에 다녀왔던 상림. 오도재. 서암정사. 칠선계곡을 엮어서 응모해 볼까 했다. 하지만 도저히 양심상 그럴 수 없었다. 한 번 더 함양을 다녀온 후에 글을 쓰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라 생각하고 있던 차에 눈이 부시게 푸르던 가을날. 드디어 길을 나섰다. 예전에는 준비 없는 여행으로 아쉬움이 많았었다. 한 스님이 고갯길을 넘다가 도를 깨달았다는 데서 유래한 오도치(悟道峙)를 구불구불 다섯 번 돌아 오도재로. 상림(上林)은 상록수 숲으로 지레 짐작했던 무식함과 벽송사와 서암정사 삼거리 갈림길에서 벽송사 가기를 포기해버린 게으름을 자책했었다. 그때. 지명 유래나 전설을 미리 알았다면 당시 느낌은 달랐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함양군청에 여행 안내서를 미리 신청해서 보는 등 나름 준비된 여행을 하였다. 함양의 상징은 무엇일까? 상림. 물레방아 등도 있지만 나를 이끈 것은 정자였다. 그래서 이름이 예쁜 화림동 계곡과 그 안의 거연정과 동호정 그리고 농월정으로 이어지는 선비문화 탐방로를 가기로 결정하였다. 거기엔 나 또한 선비가 되고픈. 아니 풍류객을 흉내 내고픈 순수한 갈망이 작용하였다. 정자처럼 마음 비워 사물을 포용하다. 전북 장수에서 육십령을 굽이굽이 넘어가면 경남 함양이다. 함양은 예로부터 ‘정자의 고장’으로 불렸다. ‘좌 안동. 우 함양’이라고 불릴 만큼 함양은 일찍부터 선비의 고장이었다. 이런 연유로 정자문화도 발달했다. 정자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풍광이 수려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옛 선비들에게 가장 좋은 피서지는 숲이 우거져 그늘이 좋고 냇물이 흐르는 곳에 위치한 정자였다. 선비들은 정자에 앉아 아름다운 자연을 시로 노래하며 즐겼다. 그러다 정자 아래 계곡으로 내려가 탁족을 하며 시를 나누기도 하였다. 함양 정자문화의 진면목은 서하면 화림동 계곡에서 만나 볼 수 있다. 이곳은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맑은 물이 기암괴석 사이를 휘 돌아가며 곳곳에 크고 작은 못을 만들어 놓았다. 예전엔 여덟 개의 못과 여덟 개의 정자가 있다 해서 ‘팔담팔정(八潭八亭)’으로 불리기도 했다. 꽃과 나무가 무리지어 피고 자라는 계곡이란 뜻의 화림동(花林洞)의 선비문화 탐방로에는 옛 선비들의 풍류를 간직한 정자가 연이어 나온다. 어떤 것은 자연과 벗 하듯. 어떤 것은 자연 속으로 빨려 들어간 듯. 또 어떤 것은 다 타버려 형체도 없는 것이 묵언의 가르침을 주는 듯. 그렇게 다채롭게 서 있다. 조선시대 손순효는 텅 빈 정자가 주변의 경치를 불러들일 수 있는 것처럼. 마음도 비워야 사물을 포용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나는 화림동 정자에 올라 다짐해보았다. 점점 작아져 가는 내 마음. 주변 풍경을 다 받아드리는 저 정자들처럼 비우고 또 비워야겠다. 그래야만 갈수록 옹졸해져 가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겠는가? 자연에 거하며 마음을 씻다. 먼저. 거연정(居然亭)에 갔다. 마치 자연의 일부처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정자 모습이 아름다웠다. 거연정은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화림재 전시서(全時敍)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872년 후손들이 세웠다. 다른 정자와 달리 거연정은 계곡 가장자리가 아닌 계곡 중간 바위 위에 세워져 있는데. 들쭉날쭉한 바위에 주초석을 놓고 건물을 올린 모습이 독특하다. 정자로 갈 수 있는 구름다리 화림교는 마침 공사 중이라 건널 수 없어 아쉬웠다. 다리만 건너면 볼 수 있는 정자와 바위. 계류가 빚어내는 멋진 경치는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정자가 있는 풍경은 원경으로 보아도 좋지만 정자 안에서 밖을 내다보면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정자에 앉아 물소리에 귀 기울이며 그 위로 떠가는 단풍잎을 쫓다보면. 나 스스로 그렇게 자연의 일부가 되는 선경일 것이다. 그래서 거연정이라 이름 지었나 보다. 동호정은 함양 화림동 계곡 정자 중 가장 크고 화려하다. 이 정자는 임진전쟁 때 선조의 의주 몽진을 도와 공을 세운 동호 장만리(章萬里)를 기리기 위해 1890년 후손들이 세웠다. 통나무 2개를 세워 만든 나무계단은 도끼로 홈을 파 비스듬히 세워 자연미를 강조하였다. 정자를 지탱하고 있는 통나무 기둥 역시 손을 대지 않았지만 내부 장식만은 단청으로 화려하다. 동호정 앞에는 커다란 너럭바위가 섬처럼 떠 있는 차일암(遮日岩)이 있다. 햇빛을 가린다는 이름이나 바위 곳곳에 새겨진 글씨들을 보면 선비들의 풍류가 깃들어 있는 곳임을 알 수 있다. 나는 때가 때인지라 탁족은 할 수 없어 그대로 너럭바위에 누워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몽진 때. 선조를 업고 수십 리를 뛰어갔다는 장만리의 넓은 등처럼 아늑하였다. 한동안 그렇게 눈이 부시게 파란 하늘을 바라보다 일어나니. 정자 옆 과수원의 사과는 장만리의 충성심마냥 붉디붉게 익어가고 있었다. 냇물에 비친 달빛을 한 잔의 술로 희롱하다. 한때. 화림동 계곡을 대표하던 정자는 농월정(弄月亭)이었다. 고요한 밤에 냇물에 비친 달빛을 한 잔의 술로 희롱한다는 이름 그대로 멋진 주변 풍경을 거느린 정자였으나. 2003년 방화로 소실돼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농월정은 조선 선조 때 예조참판을 지낸 지족당(知足堂) 박명부가 정계에서 은퇴하고 낙향해 지은 것이다. 박명부는 합천군수로 나갔을 때. 그곳에 살고 있던 정계 거목인 정인홍의 집에는 출입하지 않았다. 후에 정인홍이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인목대비도 유폐시키자. 직언으로 항소하다가 관직을 삭탈 당하였다. 나는 지족당 박명부의 삶을 생각해보았다. 그러자 풍류를 아는 유교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인 선비가 떠올랐다. 풍류(風流)란 어디에도 얽매임이 없는. 인생 자체를 즐기는 선비의 삶 아니던가? 음풍농월하면 떠오르는 이태백보다 나는 오늘. 만족하여 그칠 줄 안 박명부가 더 풍류객이었다고 감히 말 하고 싶다. “잔을 들어 밝은 달을 청하니. 그림자와 너와 나 셋”이라며 달과 이야기 하며 춤을 추었을 때는 이태백도 풍류객이었지만. 더 나아가 달을 취하려 욕심 부리는 순간. 그는 이미 헛된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농월정을 보지 못해 그 모습을 모른다. 하지만. 예전 그 형상은 동호정처럼 단청이 입혀진 크고 화려한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불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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