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하늘이 잿빛이었다. 태양은 숨바꼭질을 하듯 구름 속을 들락날락거렸다. 혹시나 눈이라도 흩날릴까 싶어 허공을 바라보면 태양은 구름 속에서 빠꼼히 얼굴을 내밀고는 했다. 그럴 때는 언제 흐렸느냐는 듯 투명한 햇살이 반짝였다. 안의면 금천리에 있는 허삼둘 가옥(許三둘 家屋. 중요민속자료 제207호)에 도착했을 때 변덕스런 태양은 환한 햇살을 공작의 꼬리처럼 펼쳤다. 금빛 햇살 속에 고택의 검은 모습이 드러났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가옥은 화마가 휩쓸고 가버려 옛 모습이 남아있지 않았다. 허나 기와집은 무너지지 않고 소생을 꿈꾸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는 오래된 기와집을 참 좋아했다. 커다란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많은 고택을 찾아 다녔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검은 기와를 얹은 지붕을 찍었고. 반질반질 윤이 나는 대청에 앉아 눈을 감고 묵은 숨결을 들여 마시기도 했다. 허삼둘 가옥도 그 중의 하나였다.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 땡볕이 이글거리는 여름이었다. 고택은 곱게 늙어가고 있었다. 앞에는 텃밭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텃밭 한 귀퉁이에는 접시꽃이 붉게 혹은 하얗게 피어 있었다. 대문이 잠겼던 것일까. 나는 집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주위를 맴돌며 사진을 찍었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르고 나는 함양으로 이사를 왔다. 그리고 겨울바람이 부는 어느 날. 다시 허삼둘 가옥을 찾았다. 검은 숯덩이를 끓어 안은 자태로 겨우 세월을 견디는 듯 보였다. 붉은 불꽃이 옛 모습을 태워버린 것이었다. 나는 아무도 없는 집안을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부엌을 들여다보고 안채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창살만 남은 창호 문을 만져 보고 사진도 마음껏 찍었다. 남겨진 고택의 먼지 냄새를 맡으며 잠시 잠깐 고택의 안주인처럼 후원에 서서 상렴에도 잠겼다. 그곳에는 기묘한 정적이 고여 있었다. 오래된 시간의 고요랄까······. 한옥은 1918년 진양(晉陽) 갑부인 허씨 문중의 삼둘이 윤대홍에게 시집와 건립했다. 보기 드물게 안주인의 이름이 붙어 더욱 유명하다. 대문채를 시작으로 여섯 동(棟)으로 이루어졌다. 중심 공간의 배치는 남쪽에 사랑채를 두고. ‘ㄱ’자의 안채와 그 옆으로 곳간채를 자연스럽게 연결하였다. 여성 중심의 공간배치와 특히 안채의 구성이 돋보였다. 안채는 별도로 담장을 둘러 구분했다. 사랑채 앞과 안채 옆으로는 아주 넓은 후원의 일종인 텃밭을 두었고 그 주위에 흙 담장을 둘렀다. 허나 담장 또한 세월 앞에 허물어지고 있었다. 비록 화재로 인해 본래의 모습은 없었지만 화려했을 법한 기와집의 여운은 남아있었다. 그 설명되지 않는 여운 때문이었을까. 몇 번 더 불타버린 고택을 찾았었다. 허삼둘 가옥은 탄생과 소멸의 과정을 겪고 다시 옛 모습을 찾으려 하고 있다. 나는 신기하게도 그 중간의 과정과 허물어진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언젠가 보수가 끝나는 날 다시 일어나 말갛게 세수를 한 모습을 보여 줄 것이다. 태양은 이제 짙은 구름 속에 깊숙이 숨어버렸다. 세찬 바람이 훠이훠이 스산한 겨울 풍경을 휩쓸고 다닌다. 겨울은 계절의 끝이다. 시작과 끝으로 세상을 본다면 겨울이 끝나면 계절은 사라져야한다. 하지만 지금의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여름이. 가을이 온다. 그리고 또 다른 겨울이 찾아올 것이다.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탄생하고. 또 언젠가는 소멸한다. 하지만 그 소멸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소멸은 또 다른 탄생을 가져 온다. 그러기에 세상의 모든 것은 항상 순환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거대한 순환. 그것을 사람들은 ‘자연’이라 부른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분이다. 그러기에 계절의 끝자락에서 겸허하게 자신을 낮추고 지난날의 모습을 참회하는 것은 어떨까. 그리하면 더 나은 삶을 시작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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