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년대 미국 뉴욕에서는 토머스 에디슨과 니콜라 테슬라 & 웨스팅하우스의 사이에 전기산업의 주도권을 놓고 역사에 길이 남을 ‘전류전쟁’이 벌어졌다. 직류와 교류 중 어떤 것을 전기 시스템의 표준으로 삼느냐를 두고 ‘전쟁’이라는 표현에 걸맞게 양측의 싸움은 매우 치열했다. 에디슨은 직류(DC·Direct Current)를. 테슬라는 교류(AC·Alternating Current)를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 싸움에서는 ‘발명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에디슨의 추악함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빛의 혁명을 일으킨 에디슨이지만 그의 삶은 언론에 의해 미화되고 왜곡됐으며. 테슬라의 천재성은 에디슨의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두 사람은 피할 수 없는 인생의 라이벌이었다. 그들의 만남. 그리고 결별 세계 최초로 백열전구를 발명한 에디슨은 1931년 84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무려 1100여 개에 달하는 발명품을 내놨다. 하지만 “천재란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는 그가 남긴 명언과 같이 사실 에디슨은 천재라기보다는 노력으로 점철된 인생을 산 노력파였다. 그는 1876년 세계 최초로 미국 뉴저지의 멘로파크(Menlo Park)에 산업연구 실험실을 세우고 오늘날 거대한 음반 산업의 기초가 된 축음기와 전구를 발명하여 ‘멘로파크의 마법사’라고 불렸는데 테슬라와의 악연도 같은 곳에서 시작됐다. 1856년 세르비아에서 태어난 테슬라는 에디슨과 달리 어릴 때부터 물리. 수학. 음악. 언어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천재성을 보였다. 발명을 할 때도 먼저 정확한 이론을 바탕으로 계획서를 작성한 뒤 일을 진행하여 시행착오를 거의 겪지 않았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한 뒤 프랑스 파리로 향한 테슬라는 에디슨의 유럽 자회사에서 근무하며 이름을 날렸고. 그의 실력이 본사에까지 알려져 1884년 6월 미국 에디슨연구소의 연구원으로 뽑혀 가게 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의 관계는 틀어지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그라츠공대에 다니던 시절부터 테슬라는 교류를 이용하면 직류 전동기의 스파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졸업 후 그는 부다페스트 전신국에서 근무하며 변화하는 자기장의 원리를 이용해 교류 유도 모터를 발명해낸다. 테슬라의 자서전에 따르면 이 아이디어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읊조리다가 갑자기 머릿속에 떠올랐다고 한다. 그는 1882년 파리 에디슨 전화회사에서 그 모터를 실제로 제작하고. 미국 에디슨연구소로 온 뒤 에디슨에게 교류 전기를 제안한다. 하지만 당시 축음기. 전화송신기. 직류전기를 발명하고 전자공업 발달의 원동력이 된 ‘에디슨 효과(도체나 반도체를 가열하면 전자가 밖으로 나오는 현상)’를 발견해 부를 축적하고 있었던 에디슨에게 교류전기는 자신의 명성과 부를 앗아갈 수도 있는 위협적인 전류시스템이었다. 테슬라는 직류전기가 일반인이 쓰기에 비싸 전기의 대중화가 어렵다는 점을 들어 교류전기를 제안했지만 이미 직류전기 시스템에 많은 투자를 한 에디슨은 그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또 에디슨은 테슬라에게 모터와 발전기의 효율을 높일 수 있는 설계를 요구하며 5만 달러를 약속하는데. 그가 성공적으로 일을 마치자 그는 “테슬라. 자네는 미국식 유머를 이해 못하나보군”하며 약속했던 보너스를 지급하지 않는다. 대신에 1주일에 18달러를 받고 있던 테슬라에게 매주 10달러를 더 올려주겠다고 제안했고. 테슬라는 이를 거절하고 그대로 에디슨연구소를 뛰쳐나온다. 교류전기. 직류 시장 파고들어 에디슨에게 몹시 실망한 테슬라는 1886년 자신의 회사를 설립하여 다음 해 교류 시스템에 필요한 발전기. 모터. 변압기를 모두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테슬라는 ‘테슬라코일’이라는 세계 최초의 교류 전기 모터의 특허를 획득한 발명가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 뒤 그의 교류 시스템이 조지 웨스팅하우스의 투자로 한층 발전하며 직류 시스템을 고집한 에디슨과의 전류전쟁이 본격화되는데. 이때가 1888년이었다. 직류 방식과 교류 방식으로 전기를 생산할 때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직류 방식으로 발전·전송하면 전류를 세게 하기는 쉽지만 전압을 높이기는 어렵다. 또 전기를 전송하는 전선의 저항에 의해 전기를 멀리 전송할수록 전기량이 줄어든다. 이 때문에 전기를 소비하는 지역과 매우 가까운 곳에 직류 발전소를 설치해야 했다. 반면 교류 방식은 전류를 세게 만들기는 어려워도 쉽게 전압을 높일 수 있어 테슬라의 교류 발전기는 수천 볼트(V)에 이르는 고전압도 만들 수 있었다. 전선에 저항이 있어 전기량이 감소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발전소를 전기 소비 지역 가까이에 지을 필요 없이 중앙 발전소에서 전기를 전송한 뒤 각 지역에 설치된 전신주의 변압기에서 전압을 110V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이 덕에 발전에 필요한 석탄이나 물만 있으면 어디든 발전소를 세울 수 있었다. 이 무렵 에디슨은 백열전구. 전선. 전기모터. 발전기 등 직류를 이용한 전기 시스템에 사용되는 모든 것을 개발하여 전기 산업을 장악하고 있었고. 그 탓에 테슬라의 교류 시스템은 처음에는 외면당했었으나 점차 교류의 장점이 입소문 나면서 에디슨의 직류 시장을 잠식해갔다. 자신의 분야에서 2등이 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에디슨은 곧바로 교류 흠집 내기 ‘캠페인’을 벌이며 반격에 나섰다. 에디슨은 ‘에디슨전기회사로부터의 경고(A Warning from the Edison Electric Company)’라는 고전압 교류전선에 가까이 갔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경고하면서 그에 감전된 사람들의 명단을 실은 팸플릿을 제작했다. 그의 직류 시스템은 전선을 땅에 묻는 방식이어서 감전될 위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뉴욕의 하늘은 고압선과 전화선으로 검게 뒤덮여 있었고 매년 수십 명의 사람이 고압선에 감전돼 죽었다. 에디슨은 팸플릿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무서운 교류를 가정에서 사용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교류 대신 직류를 사용할 수밖에 없음을 피력했다. 직류와 교류를 놓고 사태가 인간의 생명에 관련된 문제로 확대되자 언론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시카고 전기클럽의 과학자들은 직류와 교류를 과학적으로 비교하는 토론회를 열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이미 에디슨의 로비에 매수당한 상태였다. 이들은 직류가 사용 범위가 넓고 안전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직류를 전기 시스템의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토론 직후 프랑스 기업이 구리 시장을 장악하면서 구리 가격이 3배나 껑충 뛰며 상황은 테슬라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직류 방식은 전기를 굵은 구리선에 보내야 하는 반면 교류 방식에서는 구리선이 가늘어도 됐기 때문에 분위기는 점점 교류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쪽으로 바뀌었다. 에디슨. 전기의자로 교류 폐기 노렸지만 실패 궁지에 몰린 에디슨에게는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했다. 경제적인 면이나 과학적인 논리로 교류를 폐기시킬 수 없다면 그 위험성을 강조해 대중의 감정에 호소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에디슨의 눈에 해럴드 브라운(Harold P. Brown)이라는 인물이 띄었다. 브라운은 어린 시절 고압 교류 전화선에 사람이 감전돼 죽는 것을 직접 본 뒤 직류 신봉자가 된 인물이었다. 그는 ‘뉴욕 포스트’에 자신의 경험을 기술한 편지를 보내며 교류는 저주받은 위험한 것으로 법으로 금지해야 하며 직류를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본 에디슨은 즉시 브라운을 고용하여 자기 회사의 최고 기술자를 조수로 붙여주면서 교류가 인간에게 얼마나 치명적인지 입증하도록 부추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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