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에는 꽃보다 아름다운 단풍이 한창이지만 입동이 지났으니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가 땅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잎을 떨어뜨리는 계절이다. 그러나 단풍은 아니지만 꽃 중에 유일하게 가을을 빛내고 있는 색색의 국화가 우리를 위로하고 즐겁게 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 다양한 국화 중엔 작고 다부지게 앙증맞은 금국이란 품종이 있다. 꼭 이맘때였다. 여러 해 전 안동에 작은 토굴(그곳이 봉정사였지만)을 꾸리는 동수스님을 만나러 다녀온 적이 있었다. 차를 타고 멀리서 바라본 그곳은 마치 산기슭에 샛노란 유화물감이라도 풀어놓은 것 같은 진기한 풍경을 하고 있었는데 가까이 가보니 국화꽃 무더기들이 벌이는 향연이었다. 그것이 금국金菊이라는 국화꽃임을 확인하기 전에는 단풍든 차나무(?)인가 하는 생각도 잠깐 했는데 그 모습이 보성의 한 다원에서 대규모로 조성된 차밭을 보았을 때 그 규모와 아름다움에 반해 넋을 잃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가을 이후로 내가 살고 있는 이 산골에 산국이 피기 시작하면 언제나 나는 안동의 봉정사에서 보고 온 국화밭을 떠올리곤 한다. 봉정사에서 만난 동수스님은 국화차를 내주시면서 ‘가을신선’이라 하셨고. 그래서 그런지 판매하고 있는 소량의 국화차 이름도 ‘가을신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스님은 포부도 대단하셨는데 작고 귀엽지만 황후화로 불려도 좋을만한 그 금국으로 안동시가 하동이나 보성 같은 국화차 특화지역이 되었으면 한다고도 하셨다. 그 꿈이 실현되어 지금은 안동에서 금국축제를 하고 있으니 누군가의 작은 시작이 어떤 큰일을 만드는지 보여주는 예이다. 한방에서 국화는 쓰고 단 맛이 있으며 약간 찬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혈압과 열을 내리는 효능이 있으며 눈을 밝게 하고 두통에 도움이 되는 식물로 분류하고 있다. 또 폐와 간을 이롭게 하는 꽃으로 꽃이 피었을 때 따서는 그늘에서 말려 쓰면 좋다. 오랫동안 복용하면 혈기에 좋고 몸을 가볍게 하며. 쉬 늙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위장을 평안케 하고 오장을 도우며 사지를 고르게 한다. 그 밖에도 감기. 두통. 현기증에 유효하다. <조선요리제법>에는 가을에 국화의 잎을 따서 맑게 씻어 찹쌀가루를 묻혀 끓는 기름에 띄워 지져서 계핏가루를 치고 놓는다고 친절하게 조리법도 기록되어 있다. 바깥 기온이 차지니 성질이 따뜻하고 찰진 찹쌀을 이용해 음식을 만들어 먹었던 것이다. 오늘은 마을에서 유일하게 동갑내기인 친구의 집 앞을 지나다 문 앞을 곱게 장식하고 있는 국화 중의 국화 금국을 만났다. 그래서 주인의 허락도 얻지 않고 몇 송이 땄다. 집으로 돌아와 감초 한 조각과 금국 몇 송이를 넣고 물을 끓인다. 장에서 사온 밤도 몇 알 깠다. 그리고 평소에 압력솥을 이용해 밥을 하던 것과는 달리 냄비에 밥을 한다. 봄·여름에는 쓴맛이 살짝 나기 때문에 쓰지 않던 찹쌀도 날이 서늘해지기로 조금 넣는다. 국화꽃의 황금빛이 흰 쌀알에 아주 살짝 어리고 노란 밤알들이 섞인 밤이 구미를 당기게 한다. 꽃밥을 먹고 상을 물리고 다시 국화차 한 잔 우린다. 차의 맛은 텅 빈 골짜기처럼 그렇게 고요하다. 수용하지 못할 것이 하나도 없는 시간이라 그 누구와도 말이 필요 없이 하나가 될 수 있겠다. 생국화의 선명한 노란색이 주는 신선한 즐거움. 차로 만들어 우렸을 때 기품 있게 퍼지는 은은한 향기. 국화전이 혀끝에서 노는 느긋한 행복. 그리고 꽃밥(금반)으로의 마무리. 이 가을을 보내면서 이보다 더한 호사가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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