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먹을거리 협동조합 ‘끼니’의 창립선언문은 음식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 나에게도 많은 공부가 되는 것이니 지난주에 이어 조금 더 살펴보려고 한다. 노동자는 먹을거리를 직접 생산하지 않는다. 사서 먹는다. 그러니 노동자는 자신이 먹는 음식의 실체를 알 수 없다. 알 수 없으면 불안하고 넉넉하여도 빈곤감을 가진다. 이 불안과 빈곤감을 해소하기 위한 여러 전략과 구호 들이 생겼다. 국외 농산물에 대한 불안을 줄이기 위해 우리 농산물 애용 운동. 신토불이. 도농상생. 농산물 직거래 등이 주창되었다. 그러나 공산품 수출로 먹고 사는 한국 경제구조에서 이는 단지 구호로 작동할 뿐이다. 이들 구호가 외쳐질 동안 오히려 한국의 먹을거리 생산구조는 더욱 열악해졌다. 먹을거리에 대한 정신적 빈곤을 채우기 위해서는 웰빙. 로하스. 슬로푸드. 로컬푸드 등 새로운 삶의 형태가 제안되었다. 산업화 사회에서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으로 유럽에서 발상한 것들이다. 유럽에서는 이 같은 삶의 형태들이 인간을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국 상황에 과연 적용 가능한 것인지 의문이다. 유럽은 200년의 시간을 두고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었다. 한국은 그 기간이 30년이다. 유럽 농업은 산업화에 맞추어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였다. 그래서 유럽의 농민은 도시 노동자가 원하는 웰빙. 로하스. 슬로푸드. 로컬푸드의 삶을 제공해줄 수 있는 기반을 가지고 있다. 한반도의 농업도 그러한가. 유기농을 위해 윤작을 할 수 있을 만큼 땅이 넓은가. 외부에서 퇴비를 가져와 넣지 않아도 되는 순환농업의 실현이 가능한가. 높은 온습도의 여름 환경에서 농약을 치지 않고 상품성 있는 농작물의 결실을 볼 수는 있는가. 유럽의 그 수많은 농가공산품처럼 한국의 농민도 농가공품을 생산하여 판매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는가. 반나절이면 전국 어디든 닿는 이 좁은 대한민국에서 로컬은 의미 있는 단어인가. 먹을거리는 옷. 자동차. 가전제품 따위와 다르다. 유럽에서 유행한다고 따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먹을거리는 자연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에 있다. 또. 그 가공품의 생산구조도 쉬 변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인의 먹을거리 문제는 한국 상황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야 하는 것이다. 한국은 한순간에 노동자의 나라가 되었다. 노동을 팔아 끼니를 산다. 한국인은 이 일에 아직 익숙하지 않다. 먹을거리에 대한 정보라고는 자본과. 그 자본에 종속되어 있는 언론. 그리고 자본이 끊임없이 간섭하는 정부기관에서 얻을 뿐이다. 그들이 노동자의 편에 서서 정보를 제공할 것이라는 믿음은 없다. 먹을거리를 자본의 논리에 따라 산업적 가치로만 판단하려는 그들의 경향성은 이미 충분히 보았다. 학계와 여러 음식문화 단체의 연구가들 역시 자본이 짜놓은 이 구조 안에서 자유롭지 않다. 전통을 조작하고 왜곡된 미각을 강요할 뿐이다. 한국인이 특히 불행한 것은 먹을거리에 대한 그들의 거짓된 정보를 의심하는 기회조차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가 먹는 끼니가 곧 나다. 내가 먹는 음식의 실체를 알아야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한국인으로 살면서 한국인의 끼니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것은 한국인으로서 불행한 일이다. 삶과 먹을거리 협동조합 ‘끼니’는 한국인이 먹는 끼니의 실체가 선명히 드러날 수 있도록 조작된 전통과 왜곡된 미각 정보를 고발하는 일에 그 역량을 집중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먹을거리의 생산과 가공. 유통. 소비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양심에 따라 대중에게 주장과 의견을 내놓는 마당을 마련할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한국의 노동자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끼니를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모색할 것이다. 밥상 앞에서 모든 한국인이 행복해질 수 있는 미래를 꿈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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