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병곡면 도천리는 우동(愚洞,) 우계 혹은 우루목이라 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내가촌(內柯村)과 외가촌(外柯村)으로 이루어진 가촌마을과 우루목 마을을 합쳐서 도천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함양에 몇 년을 살았었지만 도천리를 가보지 않았다. 용천송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찾아간 도천리는 나뭇가지처..
병곡면 도천리(道川里)에 늙은 소나무가 있다. 나는 늙고 오래된 것을 좋아하는 이상한 성격을 가졌다. 그러니 듣고는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스름이 내릴 무렴 도천리 소나무 찾아 나섰다. 하지를 막 지났으니 해가 떨어졌는데도 허공에는 어둠이 쉬 내려오지 않았다. 마을 입구에 도착하니 ‘도천마을 안내..
십년 전 까지 나는 함양이라는 곳을 모르고 살았다. 지리산 칠선계곡 산행도 여러 번 했지만 밟고 다녔던 계곡이 지리산이라는 것만 기억했다. 함양이라는 지명을 들었지만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삼십대 후반 어느 여름날, 지리산 근처로 놀러 왔었다. 산이 있고 물이 있으면 어디나 아름답기 마련이다. ..
뻐꾸기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시간은 어느새 나를 뻐꾸기 우는 계절로 데려다 놓아 버렸다. 붉은 꽃이 떨어지고 나면 초록 잎은 더욱 짙어진다고 했던가. 꽃들이 사라지고 연두빛 잎들은 하루가 다르게 초록으로 살찌고 있었다. 녹음이 짙어지고 있는 유월, 지곡면에 있는 정취마을을 찾았다. 정취마을은 주위에..
한해의 마지막 밤, 마지막 시간이 다가온다. 그 시간에 맞추어 사람들이 종각으로 모여든다. 사람들을 위해 따뜻한 어묵이 준비되어 있고 까만 밤하늘로 날려 보낼 풍선도 준비되어 있다. 곧 새해를 맞이하는 타종식이 시작될 것이다. 자정이 되자 범종(梵鐘)이 울린다. 대애앵······. 묵직한 저음의 ..
녀석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더군요. 그러더니 쓱쓱 닦더라구요. 왜 우냐구요? 아마 가족들이 모두 집을 비웠기 때문일 거예요. 자신만 두고 모두들 떠나 버렸다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가족이 모두 상갓집에 갔답니다. 저는 일일 보모노릇을 하고 있어요. 사람이 개 보모를 하고 있다니 한심하다는 생각이 ..
끝임 없이 혼자서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얼굴에 화색까지 돌기 시작했다. 듣는 사람의 눈동자에는 지루함으로 습기가 가득한데도 혀 밑에 쌓인 말은 줄어들지 않았다. 당사자는 몰랐다. 얼마나 초라하고 허허롭게 보였는지를······. 본인의 입으로 하는 자랑은 자랑이 되지 못했다. 그것은 가진 것 없는 사람이..
함양으로 이사를 오던 해 화목(火木)난로를 하나 샀다. 겨울을 따듯하게 보내기 위해서였다. 거실 한 귀퉁이에 놓고 보니 오래 전부터 그 자리의 주인인 양 품세가 자연스러웠다. 며칠 동안 나뭇가지를 주우려 마을 뒷산을 오르내렸다. 나무를 옮기다 산길에 미끄러져 얼굴에 퍼렇게 멍이 들기도 했고, 나뭇..
함양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다. 오일장이 열리는 곳에는 이상한 냄새가 난다. 마치 잘 발효된 된장과 간장 같은 야리꼬리한 냄새랄까, 아니면 잘 발효된 거름이 풍기는 쿰쿰한 냄새랄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냄새다. 그것은 삶의 나이테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무엇을 간지럽힌다. 오일장에는 이른 시간이..
뺨에 내리는 햇살이 따스했다. 뺨 위로 봄이 내리고 있었다. 겨울 추위에 움츠렸던 어깨가 저절로 활짝 펴졌다. 두 팔을 벌리고 기지개를 켰다. 눈부신 햇살이 좋아 무작정 길을 나섰다. 느릿느릿 걷다보면 자동차를 타고 지나갈 때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였다. 노란 꽃봉오리가 쏙, 쏙 올라온 수선화도 보였..
의사는 고열의 원인을 찾지 못했다. 처방도 해열제를 먹이는 것이 다였다. 그래도 약을 먹으면 잠들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퇴원을 하고 누워서 지내야만 했다. 어둠의 날들이 기약 없이 흘러갔다. 남편이 없는 틈에 부동산에서 집을 보러 오겠다는 전화가 왔다. 집을 보러 오겠다니, 남편은 무슨 생각을 하..
한가위 보름달이 하늘에 걸려있다. 천지간이 환한 달빛으로 가득하다. 서늘함을 지닌 바람이 휘적휘적 길 위를 지난다. 사위가 커다란 옹기에 담긴 물처럼 적요하다. 보름달을 볼 때 마다 가슴이 설렌다. 아마도 맑은 공기 속에서 보름달을 바라보는 여유로움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리라. 사는 동안 우..
빨간 원피스를 입고 물레방아골 축제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벌써 두 번째 서는 무대였다. 처음에는 많이 긴장했지만 두 번째가 되니 긴장감도 덜했다. 지휘에 맞추어 연습한대로 노래를 부르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음이 너무 느슨해져 있었던 것일까. 엇박자로 들어가는 부분에서 박자를 놓쳐 버렸다..
면회시간이 되면 시매부를 보기위해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머리에 하얀 붕대를 감고 온몸에 하얀 천을 덮고 있었다. 잠들어 있는 표백의 상태였다. 스스로 호흡을 할 수 없으니 기계에 의지한 채 숨을 쉬었다. 몸에는 유리병이 고드름처럼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멀리 가 있을지도 모를 영혼에게 말을 건넸다. ..
길을 가다 나무를 만났다. 뿌리와 가지가 잘린 채 몸통만 남은 모습이었다. 혼자 서 있지 못하고 소나무에 의지 한 채 서 있었다. 뿌리가 없으니 혼자 힘으로는 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예전에 나무는 ‘참나무’로 불렸다. 허나 몸통만 남은 나무를 사람들은 더 이상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나무..
하얀 양파를 양념장에 찍어 먹는다. “아싹” 소리를 내며 양파 특유의 냄새가 입 속 가득 퍼진다. 코끝에 매운바람이 살짝 지나가기도 한다. 그래도 맛있다. 이 맛, 어떻게 설명하면 될까. 굳이 설명하자면 맵싸하면서도 달달하다. 나는 양파를 생으로 먹는 것을 즐긴다. 그렇다고 밥과 함께 먹는 것도 아니다. 오..
햇살이 농익은 오후다. 장마전선이 북상중이라지만 여전히 날씨는 무덥다. 덥다고 집에만 있으니 온 몸이 점점 무기력 해지는 느낌이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뜨거운 햇살 속에 집을 나선다. 버스를 타고 읍내로 나간다. 그리고는 상림 가까이 내린다. 걸음을 걷는다. 상림을 지나고 종각을 지나고 종합운동장..
대중탕에 나온 길이다. 열탕에 들어앉으니 온몸이 시원하다. 뜨거운 물에 몸 담그는 것을 좋아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여름이라 그런지 실내에는 사람이 많지 않다. 중년의 아낙이 몇 보이고 할머니들도 보인다. 때를 밀어주는 엄마와 딸도 눈에 들어온다. 다정히 때를 밀어주는 모습이 보기에 좋다. 탕에서 ..
마당 한 귀퉁이에 붉은 양귀비가 피었다. 딱 한 송이였다. 잔디가 점령한 곳에는 감히 자리 잡지 못하고 자갈이 덮인 곳에 겨우 한 자리를 얻었다. 박토에 뿌리를 내리고 꽃잎을 열은 것이 대견했다. 저 꽃을 피우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 기울였을 것이다. 열악한 환경에서 핀 꽃은 자신의 위치만큼 작았다. ..
홀태는 벼를 훑는 데 쓰던 농기구이다. 길고 두툼한 네 개의 나무를 서로 의지하게 세워 그 위에 빗살처럼 날이 촘촘한 쇠틀을 얹었다. 벼이삭을 쇠의 갈라진 틈 사이에 넣고 잡아당기면 알갱이는 밑으로 떨어진다. 그러기에 홀태는 알곡을 알곡답게 만들어주는 기구인 셈이다. 지곡면 어느 마을에서 홀태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