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장미들은 이름부터가 음악처럼 다가옵니다. ‘벤자민 브리튼’ - 영국의 작곡가이자 연주자의 이름을 가진 이 장미도 그렇습니다. 흔히 장미라 하면 붉은 꽃잎과 달콤한 향기를 떠올리지만, 이 벤자민 브리튼 장미는 마치 클래식 음악처럼 은은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벤자민 브리튼은 원래 ‘청소년을 위한 관현악 입문’이라는 교육적인 작품으로 잘 알려진 작곡가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이 이름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또 하나의 인연 덕분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때문입니다. 이 곡의 피아노 반주자가 바로 벤자민 브리튼이었으니까요. 당시 세계적인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와 함께 연주한 그 음반은 아직도 추억 속에 남아있습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장미는 또 다른 음악으로 다가옵니다. 장미는 제각각 고유의 음색과 향기로 연주를 합니다. 3년 전, 벤자민 브리튼 장미 묘목을 심을 때, 나는 그에게 어울릴 ‘협연 장미’를 함께 심었습니다. 마치 소나타에서 피아노와 첼로가 서로 주고받듯, 정원에서도 두 장미가 서로 어울려 하나의 하모니를 만들어가길 바랐습니다.
그렇게 선택한 협연자는 ‘밧세바’였습니다. 영국 오스틴 장미로 꽃송이가 큼직하고 중후한 분위기와 은은한 향기를 지니고 있는데, 그 풍성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마치 첼로의 선율처럼 가슴을 울려줍니다. 클래식 음악에서 첼로는 종종 인간의 목소리에 가장 가까운 악기로 비유됩니다. 따뜻하면서도 쓸쓸하고, 때로는 애틋하기까지 한 그 음색처럼 밧세바 역시 은은한 존재감으로 정원에 깊이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장미는 심고 나서 세 해를 기다려야 제대로 핍니다. 그 기다림 끝에 올해, 드디어 벤자민 브리튼과 밧세바가 풍성한 꽃을 피웠습니다. 두 장미가 나란히 피어 있는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마치 음악회에서 피아노와 첼로가 천천히 호흡을 맞추며 연주하는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두 꽃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면 향기가 실려와 작은 실내악 무대를 만들어줍니다.
사실 슈베르트가 작곡한 이 ‘아르페지오네 소나타’의 아르페지오네는 19세기 초 독일에서 만들어진 일종의 ‘기타첼로’ 같은 악기였습니다. 기타처럼 줄을 뜯기도 하고, 첼로처럼 활로 켜기도 했지요. 하지만 이 악기는 세상에 오래 남지 못하고 사라졌습니다. 다행히도 슈베르트의 이 곡만은 살아남아, 이후 첼로와 피아노 듀오로 자주 연주되고 있습니다. 요즘은 이 첼로 파트를 기타, 플루트, 콘트라베이스 등으로 바꾸어 다양한 버전으로 연주되고 있습니다. 아르페지오네는 사라졌지만, 그 음악은 다양한 목소리로 여전히 살아있는 셈입니다.
장미 한 그루가 자라 꽃을 피우기까지의 기다림은 어쩌면 음악 한 곡을 이해하는 시간과 닮아 있습니다. 서둘러서는 들리지 않던 소리가 어느 날 조용히 마음속으로 스며듭니다. 유월의 정원에서 벤자민 브리튼과 밧세바가 특별히 현란한 기교로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꽃잎이 흔들리고, 향기가 흐르며, 그 모든 것이 삶의 음악으로 천천히 스며와 머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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