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60여년전 32명의 억울한 죽음을 당한 도북마을 아픔의 역사. 함양 양민 학살 사건을 말한다 1. 잊혀지지 않는 그날의 참혹함2. 우리나라 민간인 학살의 역사3. 진실과 화해를 위한 노력4. 반복하지 않기 위한 우리가 할 일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어느덧 반세기를 훌쩍 넘겨 62년이 흘렀다. 당시 전쟁으로 수백만의 목숨이 산화하는 등 우리 민족 최대의 아픔으로 기억된다.그러나 이 중에는 사상이나 이데올로기 조차 알지 못하면서 그 속에 숨 쉬고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총부리에 난자당한 이들이 있다. 깊은 산골 속에 살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순박한 농부였던 이들. 경찰의 호출에 아무 죄가 없다며 불려간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는 이같이 숨진 이들에 대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사건'이라고 일컫는다.그들의 억울한 죽음을 가슴에 묻고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하소연조차 하지 못하는 이들. 정부의 사죄가 있었지만 한(恨) 많은 가슴속 응어리는 풀리지 않고 있다. 국가 권력은 한 생명을 앗아간 것에 그치지 않고 숨진 이의 자손들에게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며 최근까지도 어둠속으로 몸을 웅크리게 했다. 소위 말하는 '빨갱이'로 치부하면서. 함양을 중심으로 산청·함양 사건과 거창 사건은 큰 주목을 받으며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과 각종 기념 사업들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다.이들 사건은 한국전쟁이 진행되는 도중인 1951년 발생했지만 함양의 경우 전쟁 발발 전. 1949년도부터 자행돼 왔다. 군경에 의해 자행된. 국가 권력의 폭력에 의한 잔혹한 일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함양땅에서.함양지역에서의 한국전쟁은 1948년 10월 여순사건 이후부터 1963년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이 붙잡힐 때까지 15년간 계속되어졌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전쟁을 치른 지역인 것이다.  1. 잊혀지지 않는 그 날의 참혹함△ “죽어도 억울하고 드럽게 죽은기라...”▲ 도북마을 앞 야산 양민학살 사건 희생자들의 합동묘역.당시 학살로 인해 형 3명을 한꺼번에 잃어야 했던 도북마을 권재택(75)씨. "죄를 짓고 죽었나. 그냥 베끼(괜히) 죽인기라" 한 많은 그의 첫 마디는 원망도 아닌 억울하다는 말이었다. 한꺼번에 형들을 잃어야 했던 당시 열세살의 막내 동생은 이제 70을 넘겼다. 당시를 회상하는 것 자체가 그에게 고통스러운 일인 것이다.집안의 든든한 아들 3명이 한꺼번에 화를 당한 이후 그의 부모도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빨갱이’라는 오명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학살당한 이들의 죄명은 빨치산을 도왔다는 것. 그러나 "우리 먹을거리도 없는데 어찌 그놈들한테 먹을 것을 주겠나. 그냥 뺏어갔지. 안주면 총부리로 위협하고 집에 불을 지르고. 살라면 안줄 수가 없는 기라"살려고 먹을 것을 준 것이 오히려 화가 되어 돌아왔다. 당시 도북마을에는 인근에는 빨치산 활동이 활발해 마을에서는 자체적으로 자경대를 조직해 운영했다. 이 자경대에 빨치산과 내통하던 정주상이 붙잡히고. 경찰에 넘겨지면서 마을 전체의 운명이 결정됐다. 당시 경찰은 빨치산 내통자를 찾는 명분으로 이 사람 저 사람 끌어들이던 시기로 통비분자를 찾지 못하자 경찰은 ‘외상장부’를 ‘내통자 명단’으로 탈바꿈 시켰다.“아무 죄도 없응께 나간기라. 죄가 있으모 숨지 말라 나가끼고. 그래서 죽은기라. 그냥 다 잡아가서 고문하고 산에 가서 쏴 죽이고. 그냥 쏴 죽인것도 아니라 차로 갈아서 죽였다는 말도 들었어. 얼마나 억울해. 아무 짬도 모르고 죽은 기라”학살에서 살아남은 이들도 이후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빨갱이’라는 손가락질과 최근까지 이어진 연좌제의 고통이 그것이다.“청년이 없어 부역을 나가면 ‘어린놈이 나왔다’고 말을 하기도 하고 ‘빨갱이’라고 손가락질 해. 또 집안에 똑똑한 놈이 나와도 출세를 할 수 없는데 어떻게. 그냥 사는 거지” 이후 유족들은 학살 현장 근처에 접근도 하지 못했다. 빨갱이로 몰려 죽을까봐. 학살 이후 40여년이 지난 1991년에서야 유골은 수습될 수 있었다.  <도북유족회시> 님들이 뿌린 씨앗 단비 없이 자랐도다해 가고 눈서리 져도 피고 지고 또 피나니한 맺힌 가슴 도려 산 넘어 내던지고세세연년 아픔 펴고 고이 잠드소서▲ 함양읍 이은리 당그래산 인근 학살 터 표지석1992년 1월18일이 돼서야 합동 묘역이 조성되고 위령비를 제막했다. 합동묘역은 도북마을 건너편에 작게 만들어졌다. 사건 발생 후 43년만에 첫 추모제를 지낼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유족들이 1년에 한번 모여 제를 지내고 있다.학살 현장인 함양읍 이은리 당그래산에는 1996년 2월 10일 그 날의 참상을 알리는 보존 비석이 건립됐다. 현재 학살 현장은 그 형체조차 찾아볼 수 없다. 인근으로 공장이 들어서고 그 날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보존 비석만이 존재한다. 과거사 정리를 위한 진실화해위원회는 2007년 8월∼2008년 8월까지 1년간 조사를 실시. 2007년에 30인. 2008년에 86인. 2009년 4월에 14인. 총 100인이 진실규명 결정했다.△도북 사건의 전말1949년 9월20일 낮 12시. 비가 부슬부슬 오는 점심시간. 수동면 도북마을에 난데없이 경찰들이 둘러싸기 시작했다. 이후 순경이 집집마다 검색을 하며 마을 앞산으로 모일 것을 종용한다.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은 가운데 장부에 적힌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기 시작했다. 얼마 전 경비병에게 붙잡힌 이 마을 이발사 정주상이 작성한 외상장부를 들고. 아무 죄가 없던 이들은 경찰의 호명에 당당히 나섰다. 그렇게 모인 사람만 35명. 이들은 영문도 모른 체 새끼줄에 묶여 경찰서로 연행됐다. 경찰서에서는 몽둥이로 때리는 등 갖은 고문을 가해 빨치산이라는 거짓 자백을 받아냈다. 이들은 군부대에 넘겨졌으며 32명이 함양읍 당그래산에서 집단 학살됐다.이것이 도북마을 양민학살의 전모이다. 당시 이 마을에서 32명의 청장년들이 군경에 의해 집단으로 학살된 것이다. 이후 60여년이 흘렀다. △함양지역 양민 학살의 전말▲ 권재택 씨민간인 학살 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여순반란사건 이후부터 시작된다. 군경의 토벌에 쫓기기 시작한 반란군이 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인근의 지리산과 덕유산 일대 밖에 없었다. 이들은 이 곳으로 숨어들어 지역별로 해방구를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낮에는 군경이. 밤에는 빨치산이 점령했다.당시 지리산지구에서 빨치산토벌작전을 수행하던 국군 제3연대 제3대대와 함양경찰서 경찰. 특공대는 1949년 5월부터 1950년 3월까지 함양군 일대와 지리산 등에서 빨치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산간마을을 소개(疏開)했다.당시 함양경찰서는 국군과 함께 반란군을 토벌하며 빨치산과 내통하는 혐의나 식량 보급처로 이용되는 마을 주민들을 연행하거나 민간인들로 구성된 특공대(의용대)를 조직해 국군을 보좌하는 일을 했다.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빨치산에 협력했다는 오명 속에 수동면 도북마을 32명이 9월20일 학살됐으며 다음날에는 인근의 죽산리 주민 17명이 함양읍 이은리에 있는 당그래산과 안의면 공동묘지 등지에서 집단으로 학살됐다.이밖에도 안의면 주민들도 1949년 8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군경에 의해 연행돼 당그래산에서 사살됐으며 서하면. 백전면. 휴천면. 지곡면 주민들도 경찰에 의해 연행돼 사살되거나 행방불명됐다.이렇게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함양군 전 지역에서 자행됐으며 확인된 것만 86명이다. △60년간의 빨갱이 오명을 벗다함양지역 양민학살 피해자인 유족들은 최근까지 빨갱이라는 오명 속에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그 오명이 벗겨진 것은 사건 발생 60년 만인 2009년.2009년 1월16일 진실화해위는 “‘함양 민간인 희생 사건’을 조사한 결과. 1949년 5월부터 1950년 3월까지 함양 지역 민간인 86명이 빨치산과 협조. 내통하였다는 이유로 국군 제3연대. 함양경찰서 경찰. 특공대(의용전투특공대)에 의해 집단희생된 사실을 밝혀냈다"고 밝혔다. 조사결과 국군과 경찰. 특공대는 함양읍 등 7개 지역 주민들을 빨치산과 내통. 협조하였다는 혐의로 군부대. 함양경찰서. 각 지서 등지로 연행하여 고문과 취조를 한 후 함양읍 이은리에 있는 당그래산과 안의면 공동묘지 등지에서 살해했다. ▲합동묘역에 당시 희생자들의 이름이 있다.희생자들은 무장한 빨치산들이 마을에 출현해 식량 등을 요구했을 때 강압적인 분위기와 협박에 못 이겨 협력할 수밖에 없는 일반 주민들로 대부분 농사를 짓던 20∼40대 남성들이었다. 당시 안의면 특공대로 활동했던 참고인은 “잡아온 사람들을 경찰들이 몽둥이로 패서 빨갱이로 만들고 나서 총살시켰다”고 진술했다. 위원회는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 수는 86명이지만 진실규명 미신청자나 사건이후 멸족된 경우 등을 고려하면 실제 희생자는 더 많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위원회는 군경이 빨치산 토벌작전이라는 명분하에 비무장. 무저항의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연행하여 아무런 법적 절차 없이 살해한 것은 반인도주의적이고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인 생명권과 적법한 절차에 따라 재판 받을 권리를 침해했다고 밝혔다.진실화해위는 국가에 대해 유족에 대한 사과와 위령사업 지원. 군인과 경찰을 대상으로 한 평화인권교육 등을 실시할 것을 권고했다.  ● 취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 발전지원 사업비를 지원 받았습니다.  <강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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