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도의원 문정섭해방이후 46년부터 우리군 군수는 38대를 거쳤고 오는 10.26 재선거로 당선되는 군수는 39대가 된다. 65년간 평균 1.5년간을 근무했고 장수한 두 분은 민선 1-2기와 3-4기로 근무하신 정용규와 천사령은 8년간이고. 관선으로는 64년 15대 이선철은 3년3개월. 77년 22대 여주환은 3년간을 재직했다. 단명 하신 분은 초대 46년 임종국 6월과 92년 30대 문용술이 5월이다.54∼57년 4년 동안 8. 9. 10대는 申. 愼. 辛 3신씨가 나란히 임용되는 신기록을 세웠고 93년 31대 공민배. 94년 32대 유효이. 33대 오경삼은 민선 이양기까지 3명이 약속이나 한 듯 9개월간씩 근무하였으며 필자는 이 기간 내무과 행정계장으로 세분을 모셨다. 우리군 출신은 민선 3명 외 50년 5대 배상갑. 53년 7대 정창현 등 5명뿐이고 54년 8대 신종철(충남). 75년 21대 주성민(부산). 77년 22대 여주환(경북성주) 세분 외는 모두가 도내 분이다.46년 초대 임종국은 해방 이듬해 9월 초등과. 중등. 함양농업 전수학교 개학을 하였고. 46∼49년 3∼5대 조승래. 김인제. 배상갑 세분은 6.25 직전까지 지리산과 덕유산 등 공비가 만연했던 혼란기였으며 51년 6대 조창제는 문화원 창립과 52년 교육자치제 실시로 교육청을 설치하였다. 53년 7대 정창현은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서남지구 전투경찰대가 활동하여 이현상. 이영희 등 빨치산들을 사살하는 등 함양. 산청은 공비들로 사람 살 곳이 못된다며 공직자들은 이때부터 좌천지로 불안과 공포에 떨었던 시기였다.54년 8대 신종철은 보건사회업무가 향상되면서 무의면 일소등 구호를 외쳤고. 고 노근현씨가 처음으로 한의원을 개원했다. 56∼58년 9∼11대 신종용. 신선열. 송봉재는 56년 대통령후보 신익희가 서거되고 57년 구 석복면과 함양면이 합병을 하였으며 59년 가수 남상규의 왕십리 밤거리에 구슬프게 비가 내리면 등 노래가 유행하는 정치적인 혼란기였다. 60년 12대 이상철은 4.19의거와 61년 13대 백태흠은 5.16군사혁명으로 교육자치제가 폐지되고 국가재건최고회의 국민운동으로. 승공태세에 매진하는 시기였으며 보훈지청이 개청되었고 농협이 발족되고 62년 문화원이 천령문화제를 개최하였다.63년14대 엄형휴는 식량증산시책을 추진하였고 교육청이 재개되었으며 64년 15대 이선철은 향토건설과 소득증대. 65년 KBS중계소 설치 및 67년 지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68∼69년 16∼17대 강삼재와 박경제는 농촌에 산재한 농가들을 집단화하는 독가촌사업과 오지개발사업을 전개하였다. 70년 18대 김상조는 곰방대 담뱃대를 물고. 산재한 문화유산을 모와 유출하였고 문화원 문화상 제정 및 산지개발과 취약지 대책을 역점으로 추진했다. 71년 19대 이재을은 인자하셨는데 군정(軍政)당시 전국의 암반관정 정비실적평가에서 부진하여 그 직을 그만 두었고 필자는 이때 공직에 임용되었다.73년20대 원종서는 안의면의 춘전. 진목리를 거창 남상면으로 편입시켰고 75년21대 주성민은 내무부 교부세 계장을 지내시다 오신 분으로 많은 예산을 지원 받았다. 77년 22대 여주환은 함양여씨로 38세의 젊은 나이로 3년간 재직하면서 학사루 이전. 지곡 시목마을 사과단지조성. 논개에 대한 행적조사 등을 하셨고 79년에 필자가 담당했던 지방세수 증대방안 사례연구 발표회에서 3위에 입상. 진주에서 정종을 8잔씩 마시는 등 평상시 숙직과도 장기와 바둑을 하는 등 직원들과도 잘 어울렸다.80년23대 조규섭은 구보건소와 함양상설시장을 매각 군청사 신축을 시작하였고 흑염소를 사육 이백고를 생산 소득증대에 이바지했다. 상도 출장시 필자는 관사에서 따님과 모면장이 상납한 쏘가리 몇 마리를 시식한 괘씸죄에 걸려 읍면으로 쫓겨날 뻔 한 적이 있었다. 81년 24대 임종택은 성미가 급하고 청사신축 및 관사문제로 재무과장과 경리계장이 혼줄이 났으며. 청사 앞 광장에서 넘어져 얼굴이 찢어질 때 수행을 하였으며. 용추계곡 진입로를 새마을 사업으로 완공 전국적으로 매스컴을 타기도 했다. 82년25대 이영택은 함양읍 용평리 분동을 하였고 84년 필자가 문화공보계장 재직시 우리군 최초로 관광함양 책자을 제작 발간했다. 85년 26대 이남기는 군수실에서 고함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농지의 불법전용과 관련 필자가 한들 군부대 진입로. 마천석재 이화요업 금광도기 등등을 고발하기도 했다.86년 27대 조태기는 거창의 모 건설회사에 현 함양읍 상설시장 쌀시장 2층 아파트특혜 시비로 진해부시장으로 좌천되었다. 88년28대 최낙건은 등산과 낚시를 즐겼고 취로사업으로 오도재 도로를 시작하였고. 논개묘역 정비사업을 확장 시행하였다. 직원단합을 위해 전 직원이 1박2일 일정으로 지리산 등산을 하였고. 임기말년에 서상의 대영석재허가건과 관련 직위해제 되었지만. 필자가 감사계장 재직시 증빙서류 일제를 잘 챙겨줘서 행정소송에서 승소한 뒤 복직되었다.90년 29대 김인규는 성미가 급하고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술은 계속 드셨다. 필자를 감사계장은 실과장과 같은 직위라며 등산이며. 회식자리에 꼭 참석시켰다. 92년 30대 문용술은 하우스가 불모지인 우리군의 소득증대를 위해 많은 농민들을 김해 밀양에 견학을 시켰고. 도지사에게 사표를 제출하고도 마천과 서상 산불진화에 끝까지 임무를 마치셨다. 93년 31대 공민배는 군수의 정보비와 판공비가 대폭 삭감된 시기에 자치단체장에 취임한 분으로 함양읍 학당마을을 분동하였고 읍면 여직원들의 이름까지 외우고. 전별금은 도청 기자들에게 나누어 주웠다. 94년 32대 유효이는 청빈한 공직자로 군의 방만한 인력구조에 개탄을 하면서 기능직 밑에 상용잡급이 있고. 그 밑에 일용이 있다면서 대대적인 인력감축을 단행하였고 승진시 읍면전보. 읍면6급 3명을 전격 강등없이 발탁. 인사혁신을 하여 민선 때 전국의 인력감축 구조조정을 우리군만 하지 않았다. 공직자 체육대회시는 400여 전 직원에게 술을 권하고 받아 마신 세계최고 술꾼이기도 하였다.94년 33대 오경삼은 함양의 소고기 맛이 최고라며 3∼4개월간 계속 왕년의 B식당을 애용하였고 도천∼구라선 개통과 퇴직 후 인심좋은 함양에 산다며 필자의 집을 사기도 했다. 95년 민선 정용규는 경지정리 및 농로포장 등 우리군 농업의 기반을 구축하였고. 수동과 휴천의 토지를 매수 오늘의 한국화이바나 함양제강이 입주할 수 있었다. 2002년 천사령은 태풍 루사로 국비 2.500억원을 지원받아 도로 하천 제방 교량 등 기반시설을 구축하고 상림 등 관광기반을 구축했다. 2010년 38대 이철우는 군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음에도 아쉽게 취임 1년만에 도중하차했다.이제 오는 10월26일은 39대 군수를 재선거하는 날이다. 군민 모두가 헌신과 도덕성. 창의력과 능력이 있고. 군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리드로서 군민을 하늘과 같이 섬길 줄 아는 성실한 분. 도중하차하지 않고 임기를 마칠 분. 사리사욕을 부리지 않을 분한데 투표를 하여 구겨진 함양의 얼굴을 활짝 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