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남도부 하준수 젊은 시절>구본갑의 지리산 여행기 - 92편6·25 특집 제1탄이병주 대하소설 <지리산> 실제 주인공 한국전쟁 때 조선인민유격대 사령관남도부<하준수>. 삶과 죽음 심층취재“일본의 중앙대학 법학부를 다니던 하준수(남도부)는 학도지원병제가 발표되자 이를 거부하고 귀국. 지리산으로 숨어 들어갔다. 당시 지리산에는 징용·징병을 거부한 청년들이 약 300명 가량 숨어 있었는데 하준수는…”후일. 하준수는 남부군으로 편입된다. “남부군은 남한빨치산 중 가장 완강했던 무력집단이었지. 그래서 가장 처참하게 쓰러져 갔으면서도 북한정권에 의해 버림받고 마는 비운의 병단(兵團)이었다네” 우리나라당(?) 했으면 대통령하고 남았을낀데…# 1988년. 이 땅에 전두환 이름 석자가 지워졌던 역사적인 해였다. 전두환에 이어 같은 군부출신 노태우가 대통령 권좌에 올랐던 해이기도 했다. 노태우는 전두환과 차별화하기 위해 각종 민주화 정책을 펼쳤다. 이 해. 이색적인 단행본이 출간. 장안의 화제를 모았다. 최초로 공개되는 <지리산 빨치산 수기 남부군 上下>가 바로 그것. 남부군은 한국동란 중 지리산 속에서 암약했던 조직적 좌익 게릴라부대를 말한다. 정식호칭은 독립 제4지대.저자는 빨치산 출신 이태(李泰: 남부군 종군기자 출신. 1988년 당시 직책은 김영삼이 이끄는 민주산악회 산악대장).당시 이 책은 70만부 이상 판매되었다. 이어. 정지영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어 빅히트를 쳤다. 안성기가 주인공 이태 역을 맡았으며 죽은 최진실이 여자 빨치산을 열연. 톱스타 반열에 오르게 된다. 1988년 6월. 필자는 여성지 <주부생활> 기자였다. 데스크는 필자더러 저자와 함께 지리산으로 내려가 파르티잔(빨치산) 루트를 취재하라고 지시했다. 그 해 여름. 취재팀은 마천을 거쳐 백무동. 제석봉 등을 답사했다. 3박4일 빨치산 취재를 마친 후 우리는 해단식을 치르기 위해 함양 터미널 옆 허름한 선술집을 찾았다. 날씨…청승맞게도 장대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답사팀은 막걸리에 파전 시켜 놓고 서너 시간 동안 술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저자 이태가 선술집 창밖을 내려다보며 “여기가 좌안동 우함양…산세 수려한 함양 맞제? 그래. 함양이라. 남부군 중에 함양 거창 산청 사람 참 많았지. 지리산에 뭐 묵을 끼 있다고 오직 조국통일 그 하나만 꼭 이뤄 보겠다고 함양 거창 산청 사람들이 꾸역꾸역 지리산으로 안 올라 왔나. 1950년 전쟁통에. 그 당시 남도부라는 걸출한 빨치산 지도자가 계셨는데 그 양반 고향이 함양이었지?”# 남도부. 본명은 하준수. 그는 함양 거부의 아들로서 일본 중앙대학교에서 법 공부를 했다. 1950∼53년 한국 동란 때 이현상이 이끄는 남부군에서 전투 부사령관으로 맹활약했다. 전쟁이 끝난 1954년 1월 21일 대구 동인동 한 민가에서 체포. 그 해 10월16일 사형을 언도 받고 다음해 8월. 서울 근교 육군 사형집행장에서 총살형에 집행됨으로써 파란만장한 35년 삶을 마감한다. 저자 이태가 남도부에 관해 이런저런 말을 하자 선술집 할매 말하길 “보소. 서울 사람들요. 나도 그 양반 잘 아요(알아요). 아주 미남이셨고 카라데(당수). 씨름 축지법 못하는 기 없었던 장군였능거라. 공산당 안 하고 우리나라당(?) 했으면 일국의 대통령도 하고 남았을낀데… 참 아까분 어른이셨어. 자식들? 슬하에 2녀 1남(원래는 3녀 2남. 한국전쟁 중 2명 죽음)이 있었는데 그 알라(아기)들. 아부지 죽은 후 서울 외갓집에 가서 자랐을 꺼라. 마누라는 전쟁 전 월북했고.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북한 요직 맡았으니 박헌영 일파로 분류되어 그만 숙청되었다느니…”이때 이태는 말한다. “저 할무이 (남도부에 대해) 많이도 아시네. 남도부는 뭐랄까? 할무이 말씀처럼 일국의 장상이 되고도 남을 인물이지. 우리 같은 빨치산이. 허허. 그저 미 괴뢰국가전복. 위대한 사회주의 건설을 외치며 무대포(?)로 국방군과 전투했다면 남도부는 왜 이 땅에 사회주의가 건설되어야 하는지 깊이 고민한 사람이었네. 그의 행적을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이병주가 쓴 실록대하소설 <지리산>을 읽어보시게. 이병주캉 남도부는 친구 사이야. 이병주는 소설 <지리산> 통해 남도부를 "외세에서 벗어나. 주권 있는 나라. 올곧은 나라로 만들기 위해 큰 노력 한 위인이다"고 묘사했지.”-외세라면 미국?“그렇지. 아메리카(America)!”-이태 선생께서는 남부군의 존재 그리고 활동상을 어떻게 정의하세요?“남부군은 남한빨치산 중 가장 완강했던 무력집단이었지. 그래서 가장 처참하게 쓰러져 갔으면서도 북한정권에 의해 버림받고 마는 비운의 병단(兵團)이었다네”이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북한정권은 빨치산들에게 가혹한 희생만 요구했을 뿐 그들의 생명에 대해서 조그만 고려도 관심조차도 피력한 적이 끝내 없었어… 그 무렵 남한 산악에는 수천의 빨치산들이 일체의 정보로부터 차단된 가운데 절망적인 항전을 계속하고 있었으니 만일 북한당국이 인명의 소중함을 알았다면 아니 추호의 동지적 정의(情誼)라도 있었다면 그 절망 속의 생명을 구출할 노력을 기울여야 했어야지” 남도부 묘터와 생가전쟁기념관화 할 계획 없나?▲ 조선 순조 때 지은 남도부 생가. 원래 열두칸 기왓집이었다. # 세월이 지나…2011년 6월. <주간함양> 데스크로부터 “6월 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빨치산 관련 기사 하나 장만해 봅시다. 혹여 남도부라는 빨치산 아십니까? 한국전쟁 때 조선인민유격대(朝鮮人民遊擊隊) 사령관으로 맹활약했다면서요? 함양군 병곡면에 그 분 무덤도 있고 생가도 있습니다. 증언해 줄 사람도 있구요. 어떻습니까. 다음 주 지리산여행기 코너에 게재함이?”“아주. 좋은 기획입니다. 우리 현대사 속 최대 비극. 61년전 한국전쟁 때 꽃다운 나이로 숨져간 남한 빨치산의 원혼을 위로할 겸. 취재합시다”데스크로부터 취재주문을 받고 필자는 남도부에 대한 취재방향을 아래와 같이 잡았다. 남도부(본명 하준수). 닉네임 남도부 속에 숨어있는 코드는? 1949년 사회주의자들을 규합 보광당을 창당했는데 그 정당 정책은. 남부군 시절 활약상은. 처형 후 슬하 자식들은 어떤 삶을 살았나. 마지막으로 군청당국에 문의. 이런 질문을 하고 싶다. “전남 보성군 벌교면에 가면 빨치산 소설 태백산맥 기념관이 있다. 함양군 병곡면에는 빨치산 지도자 남도부 생가와 무덤과 슬픈 사연이 있다. 이를 전쟁기념관화 할 생각은 없는가?”# 남도부의 조카 하선국(함양검도관장)과 함께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 우루목 계관산 자락을 찾았다. 이곳에 잡초 우거진 무덤 1기가 있다. 남도부 묘다. “(하선국의 말) 1955년 처형당한 후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심더. 처형당하고 10여년이 흐른 후 남도부 친척 아줌마 꿈에 남도부가 나타나 이런 말을 했다 캐요. 묘가 없어 구천을 떠돌고 있다. 아들(상영)하고 의논해 묘를 만들어 다오. 해서. 친척 아줌마는 상영이 형하고 의논. 묘를 세우게 됩니다. 시신이 없어 참나무를 깎아 사람 모양 만들어. 이걸 시신 대용으로 해. 안장하게 되었지예"무덤터에서 10분 거리에 생가터가 있다. 아무도 살지 않는다. “지금은 퇴락. 아무 짝에 쓸모 없는 집으로 변했지만 그래도. 저 집이 조선 순조임금(純祖. 1790∼1834)때 지은 고옥이라예. 원래 열두칸 기왓집였다케요. 동학 교주 수운 최제우가 자주 이 곳에 와 유숙했다고 합니다”▲ 신기 어린 용천송(龍泉松)수운 최제우(1824∼1864)는 조선 말기의 종교사상가로 민족 고유의 경천(敬天) 사상을 바탕으로 유(儒)ㆍ불(佛)ㆍ선(仙)과 도참사상. 후천개벽사상 등의 민중 사상을 융합하여 동학(東學)을 창시하였다.“우루목(남도부 생가)에 신령스런 소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예. 이름하여 용천송(龍泉松)이라 케요. 용이 우물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특이한 것은. 이 소나무 밑 뿌리 쪽에 우물이 있는데 아무리 심한 한발에도 마르지 않는다 함니더. 속설에 따르면 동학교주 최제우가 우루목을 자주 찾게 된 데에는 바로 용천송 때문이라 카데예. 왜 이 소나무를 찾게 되었는지 그 다음 이야기는 잘 모르겠심더”# 자. 이제부터 지리산 빨치산의 대부 남도부(하준수)의 삶과 죽음을 추적해 보자.▲ 소설가 이병주주요작품으로는 파르티잔 비극적 삶을 그린소설 <지리산> <국화와 삐에로>가 있다. 하선국씨의 증언이다.“선생은 1921년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 바로 이곳에서 태어났심더. 부친 하종택 어른은 천석지기로써 오래간 면장을 지냈지예. 함양초교를 거쳐 진주중고 다니다 그곳에서 일본인 교사를 폭행해 퇴학당하고 일본으로 유학 갑니다”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저서 <한국현대사>를 통해 해방직전 남도부 활약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일본의 중앙대학 법학부를 다니던 하준수(남도부)는 학도지원병제가 발표되자 이를 거부하고 귀국하여 친구인 노동무와 함께 고향 근처인 지리산으로 숨어들어갔다. 당시 지리산에는 징용·징병을 거부한 청년들이 약 300명 가량 숨어 있었는데 하준수는 이들을 중심으로 1945년 3월 동지 73명을 모아 보광당을 조직하여 일제의 전쟁수행을 방해하고. 장차 연합군이 조선에 상륙하는 경우 이에 호응할 수 있도록 군사훈련을 실시했으며. 무기의 입수를 위해 인근의 경찰주재소를 습격하기도 했다”# 1945년. 남도부는 덕유산에서 열혈 동지 70여명을 모아 결사단체인 보광당을 창당 그 수령이 된다. 보광당 강령은 "해방 조선땅에 평등사회를 실현하자". "곧 건국할 민주대한은 더 이상 외세의 간섭을 안 받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였다. 1945년부터 49년. 한반도는 미군정체제였다. 남도부는 보광당 당원에게 “미국의 간섭 때문에. 이 땅에 자주적인 민족국가는 수립될 수 없다. 산 속으로 들어가 미군정과 투쟁함으로써 우리의 이념. 가치를 발휘하자” 1949년 남도부는 조선인민유격대 제3병단 부사령관에 임명된다. 그는 당원들과 함께 지리산 태백산 등지에서 미군정을 상대로 유격전에 벌이게 된다.(그가 투쟁했던 태백산 유격지구는 북으로 태백산과 소백산 국망봉을 중심으로. 남으로 경북 안동. 청송에 이르는 지역을 말한다)계속되는 하선국씨의 말. “이때. 닉네임을 남도부라고 지었다 합니다. 풀이하면 좀 살벌합니다. 남한 경상도 부산까지 외세 박살내고 참된 조국통일을 이루겠노라가 되겠슴니더”1950년 이후 남도부 보광당원들은 이현상이 이끄는 남부군에 편입. 태백산 일월산 등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이다가 휴전 후인 1954년 부하의 밀고로 대구에서 체포된다. 1955년 여름 총살형으로 처형. 조국분단 때문에 희생된. 비극적인 삶을 마감하게 된다.(다음호에 계속)구본갑|본지칼럼니스트busan70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