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희수 봉평교회 목사내 남편이 교회에서 맡은 직분은 목사다. 나 또한 그렇다. 그러나 남편이 목사인 덕(?)에 나는 자동으로 ‘사모님’이 된다. 내가 목사인줄 뻔히 아는 사람들이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사모님’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사람들은 별 생각 없이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게 편해서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일부러 그렇게 부른다. 내 남편을 ‘사부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을 본 적이 거의 없다. 우리 사회 문화적인 정서는 여전히 남성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이다. 모든 것이 남자 위주로 돌아가는 이 땅에서 여성이 겪어야 하는 편견과 차별. 나는 이것을 피부로 느끼며 살아간다. 사람들은 그저 생각 없이 하는 말과. 그저 자기가 편해서 하는 말과 행동에 명백한 인종차별이나 남녀 차별 또 장애인들을 차별하는 의식이 드러나서 그 말과 행동으로 인해 어떤 사람은 화가 나기도 하고 마음에 상처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잘 눈치채지 못 한다. 한 번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여자 분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분은 우리 부부가 둘 다 목사인 줄 알고 있었다. 이야기 도중에 나에게 “희수씨는 어때요?”라고 물었다. 조금 후에 내 남편에게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하고 또 묻는다. 나는 갑자기 열을 받아서 대놓고 이렇게 물어보았다. “당신은 어째서 우리가 똑같이 목사인데 나에게는 ‘희수씨’라고 호칭하고. 내 남편에게는 ‘목사님’이라고 부르지요? 혹시 남녀차별적인 생각을 가지고 계신가요?” 그분은 전혀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한 말이었는데 내가 남녀차별의식이 있냐고 대놓고 물어오니 몹시 당황하여 변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끝내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나를 무시하는 어떤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내가 너무 했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속으로는 불쾌하면서도 그저 별로 괘념치 않는 것처럼 넘어가는 일은 내게는 정직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그런 문제는 나에게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면서 성숙한 척하는 것이고. 한편으로도 겸손한 척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런 일상적인 일로 때마다 눈에 불을 켤 수도 없고 따지며 사는 일은 너무 피곤한 일인데 나는 아직도 부대낀다. 그저 편하게 넘기는 일이 왜 이리 힘든 걸까? 세상에 산적한 문제가 얼마나 많은데. 호칭 하나 가지고 이렇게 복잡한 생각을 하며 사는 나는 얼마나 피곤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인가?가끔 뉴스를 통해 장애인들이 우리나라 국민이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통행의 권리를 위해 도로에 누워 격렬하게 시위하는 모습을 볼 때 처절한 마음이 든다. 비장애인 위주로 만들어진 온갖 시설들은 장애인들에게는 아무리 먹으라고 해도 먹을 수 없는 그림의 떡이다. 약자가 권리를 보장받는 길은 강자의 배려에 의해서이다. 동등하게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돕지 않으면 결코 약자 스스로 권리를 누릴 수 없다. 엄마가 아기를 돌보는 일은 힘들지만 가장 아름다운 일이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약자를 먼저 배려해 주는 세상. 소수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들어주는 세상이 생명을 살리는 세상이다. 예수가 꿈꾸었던 세상이다. 글이 자꾸 꼬이면서 길어진다. 현실적인 대안문제는 뒤로하고 당장 나는 이 피곤함을 어찌 극복할 것인가? 결국 내 영성의 문제로 귀착된다. 얼마 전에 내 친구가 자기 딸을 데리고 천체 관측을 하는 곳에 가서 별을 구경하고 왔다. 친구가 하는 말이 자기는 그 별들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거기 흠뻑 빠져 별들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딸은 함께 별을 보던 꼬마들이 어찌나 시끄럽게 굴던지 어수선해서 자기는 별들을 잘 못 보았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아직 세상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 그러나 나는 언제까지 바뀌지 않는 세상을 탓하며 불평만 하고 있을 것인가? 나는 언제까지 주위의 시끄러움을 탓하고만 있을 것인가? 이제는 눈을 들어 저 아름다운 별들에 집중하자. 진정 별의 아름다움을 보는 자는 주위의 소근거림이나 어수선함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법이다. 아니. 그 별을 보는 순간 이미 어떤 소음도 더 이상 들리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