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부터 트랙터 다루는 기술을 배웠다는 김상일씨가 여유있게 손을 들어 보이고있다.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사람을 향한 사랑으로 기부가 일상이 되어 버린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아직도 '비움'에 대한 이치를 깨닫지 못한 기자에게는 멀게만 느껴진다. 돈이 많다고 해서 그 돈을 쉽게 번 것은 결코 아니지 않겠는가.내 가족. 내 사람. 내 것에만 똘똘 몰아 퍼 주고 싶은 인간심이 그에게는 없는 듯 하다. 게다가 새로운 인연에 '거침없이' 사랑을 베푸는 그에게는 그저 '?(물음표)'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함양 토박이는 아니지만 함양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사람. 만나고 싶었던 그. 김상일씨 집을 지난 18일 방문했다. 김상일씨 집 초입에 들어서자 길 따라 잘 정돈된 정원과 뒷산의 나무. 집 앞의 논과 밭. 이 모든 것들이 사람을 반기고 있었다. 입구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방갈로는 옛적 사랑채처럼 길손을 맞고 있었다.               - 편집자말-  ▲ 이앙기에 모판을 옮기는 솜씨가 제법 농부의 냄새가 난다.태양이 머리 가까이에서 내리쬐던 한 낮. 김상일씨가 땀을 훔치며 논에서 걸어나온다. 작업복 차림에 여기저기 진흙을 묻힌 채 일행을 맞는다. 오늘은 모내기를 하는 날이다. 물을 대 놓은 논에 이앙기가 홀로 서 있다. 일군은 보이지 않는다. "모내기 하다가 논에 물을 너무 많이 댔다고 해서 다시 물을 빼고 있어요. 네다섯 시간은 지나야 다시 모를 심을 수 있다네요" 올해 처음 벼농사에 도전하는 김상일씨의 말이다. 이앙기로 모내기하는 논에 물을 너무 많이 대면 뜬 모가 생기니 모심기는 잠시 중단 한 듯 싶다. 농사초보자 티가 난다. 그를 위해 전문가 친구들이(물론 이곳에서 알게 된) 여기 저기서 전화가 걸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이것 또한 그가 함양. 수동에 자리잡은 후 얻은 또 하나의 재산이다. 사람이 그의 새로운 재산이 된 듯 하다. 다리가 불편하신 어머니(91세)와 아내. 손자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그는 화요일 아침 부산에 있는 회사로 출근해 금요일 오후면 이곳 수동 도북 집으로 온다. 이사를 와서 시작한 농사는 감자. 옥수수. 고구마. 고추를 수확해 보았다. 올해 입학한 손자의 먹을거리와 소일거리로 시작한 농사는 60여명의 직원들에게 수확물을 간식거리로 퍼주었다. 다섯 손자들이 주말이나 방학에 여기를 자주 찾다보니 따먹는 재미라도 느끼게 해 주려니 계절따라 내내 일손을 놓을 수 없다. 집 앞에 모내기 할 논은 4마지기. 새롭게 도전하는 벼농사를 위해 그는 트랙터에 포크레인까지 동원해서 20여년 동안이나 묵혀있던 논에 돌을 골라냈다. 쌀 수확을 해서 직원들에게 한 포씩이라도 나눠주고 싶은 욕심에 시작한 벼농사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논 4마지기에 부은 돈이 평생 먹을 쌀을 사고도 남을 비용이 들었다. 밑지는 장사지만 그는 즐겁기만 하다. 부산에서 한영기업(선박안전 관련 사업)을 운영하고 있는 김상일씨가 함양 수동면 도북마을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은 지난 2005년. 그의 말처럼 '함양에 터를 잡게 된 것은 악연이 맺어 준 인연'이다. 물류창고를 지으려고 골짜기에 땅을 사놓고 동네사람들의 반대로 무산되자 지리산 천왕봉이 눈앞에 펼쳐지고 노고단. 덕유산이 집 앞마당을 채우는 이곳에 집을 짓게 됐다. 함양과 김상일씨를 맺어 준 이 고마운 악연 덕에 그의 도움을 받게 된 함양사람이 한 명. 한 명씩 늘기 시작했다.2007년 국제이주여성 친정방문 왕복항공료를 지원한데 이어 도북마을발전기금. 수동중학교장학금. 함양제일고장학금. 함양군장학금. 수동초장학금·발전기금. 수동한글정보학교 후원금 . 경노모당에 연료비지원. 관내마을회관·수동복지회관에 에어컨 기증. 수동파출소에 벽걸이TV기증. 함양군청에 자전거 110대 기증 등 그의 기부는 계층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끊임없이 이뤄지고 있다. "기부하는데 조건이 어디 있습니까? 필요한 곳에 도움이 돼 드리는 것이지요. 추우면 난로를. 더우면 에어컨을 기증하는 것뿐이다"며 이유를 달지 않는 그의 말에 할 말을 잃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쉽지 않은 선행이 더욱 가치 있게 느껴지는 것은 '기부'를 특별히 치장하지 않는 김상일씨의 모습 때문이다. 조건 없는 그의 기부는 이미 어릴 때부터 몸에 배었다. 김상일씨의 아버지는 6.25이전부터 보육원과 양로원을 지원해 왔다. 어린 시절 보육원아이들과 어울리고 양로원에서 놀다 보니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의 외로움과 힘듦을 익히 알고 있는 그다. 뿌리부터 박힌 그의 선함은 4대가 함께 사는 집안의 가장이 된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뿐이다. 어떤 특별함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너무 시시하게 끝나버린 기부에 대한 그의 발자취의 지론은 그저 농사를 짓듯. 밥을 먹듯. 사람을 사귀듯. 자연스러움에서 드러나는 기부천사의 모습이었다. 단 한가지. 세속인 기자의 염려라면 그의 선행으로 인해 그가 더 귀찮아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의 기부를 이용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그 사람 삶을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과 같다. 헌혈 후에 주는 빵은 뿌듯한 마음에 달콤하고 맛있지만 빵이나 음료수를 주면서 헌혈하라고 한다면 기분이 상하는 경우처럼 말이다.곰곰 생각해 보니 기부천사를 만난다는 핑계로 모내기로 한창 바쁜 그를 자리에 앉힌 취재진도 사실 불청객이지 않았나 싶다. 초대받지 않은 취재진이 그의 점심시간까지 빼앗았음에도 불구하고 인색하지 않았던 그의 미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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