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을 일부에서는 도자기 전쟁, 혹은 문화 전쟁이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본 고(稿)에서는 조선의 도공들을 납치해 간 후의 행적을 살펴보고 도자기 전쟁이란 의미를 살펴본다.1592년 4월 13일 일본은 16만 7250명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거의 20여 일 만에 한양까지 공략을 했다. 선조는 의주까지 피난을 가면서 백성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뒤로하고 경복궁을 버렸다. 처음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했을 때 한양이 20일 만에 함락된 연유가 길을 내어준 게 아닌가 하고 의심을 했다. 당시에 명나라와 사대 관계였던 조선은 왜군의 정명가도(征明假道)란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었다.전쟁으로 인해 백성들의 피해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었다. 왜군들은 전 국토를 유린했고 일본의 기세는 강했다. 이에 불안해진 명나라는 자국에도 영향을 미칠까 봐 구원병을 보냈다. 조·명 연합군과 이순신의 보급로 차단 때문에 왜군은 남해안으로 후퇴했지만 그곳에 성을 쌓고 명나라와 협상을 했다. 7가지의 당치 않은 협상 명분을 내세워서 협상은 결렬되고 다시 일으킨 전쟁이 정유재란이다.임진왜란은 명나라를 정복하려고 일으켰다면 정유재란은 남쪽 4도 특히, 전라도를 중심으로 충청도, 경기도를 평정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조선인을 잡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여 20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포로들을 노예로 팔기도 했고 시키던 일이 끝나면 가죽을 벗겨서 짐승처럼 잡아먹는 만행을 저질렀다. 왜군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줄로 목을 묶어서 끌고 가기도 했다.인신 매매상에게 잡혀간 조선인들은 유럽 쪽으로 많이 팔려 갔다. 당시에 노예 시장의 가격이 1/6 정도로 하락할 만큼 많이 잡아갔다고 한다. 이렇듯 많이 데려간 이유는 일본 내부의 부족한 노동력을 채울 목적과 싼값에 노예로 팔아서 군비를 대신할 목적이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특별 취급을 받는 조선의 장인들이 있었으니 바로 도자기 기술자들이었다. 처음에는 “사로잡은 조선인들 가운데서 세공 기술자와 바느질을 잘하고 손재주가 있는 여인들을 데려오라”고 명령했는데 그 후에는 도공들을 포로로 많이 잡아갔다. 조선의 도자기 기술자들은 당시에 세계에서 뛰어난 도자기 기술을 보유하여 나라를 크게 발전시켰었다. 일본에서는 차와 찻잔에 관심이 아주 많았고 정치에도 이를 이용하였다. 조선의 자기와 도자기 기술이 일본의 지배층에서는 부와 명예의 산물이 되었다. 그리고 조선 자기에 대한 환상과 욕심으로 이어져 도자기를 수입해야 하는 상황에서 조선 사람만 잡아 오면 된다는 생각에서 조선의 기술자들을 포로로 잡아갔다.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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