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동족상잔의 아픔을 가진 대한민국. 75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지만 그 아픔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전남 영암, 충남 태안, 경남 함양 등의 민간인 희생자들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 혹은 한국군에 의해 아무런 이유 없이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이웃이 이웃을 죽이는 비극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사과와 추모, 용서 없이 75년이라는 시간을 흘려보낸 채 살아오고 있다. 이에 낭주신문·태안신문·주간함양은 공동취재팀을 구성해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을 가진 대전 골령골과, 여순사건의 아픔이 서린 전남 여수·순천, 4.3의 아픔을 간직한 제주 평화공원, 그리고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찾아 민간인 학살 피해지역의 실상과 피해자 유족의 이야기를 담고자 한다.   왜 죽었는지, 왜 죽어야만 했는지…. 우리는 아버지 얼굴도 몰라요. 아버지가 보고 싶으면 동네 뒷산에 막대기 하나 꽂아 놓고 술 한 잔 올리며 울다 내려옵니다.”이른바 ‘여순사건’이라 불리는 여수·순천10.19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 중이던 조선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장병들이 제주4.3사건을 진압하라는 이승만 정부의 출병 명령을 거부하면서 발생했다.당시 제주에서 단독선거·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무장봉기가 일자, 이승만 정부는 군의 주도로 제주도 토벌을 계획했고, 이를 위해 여수 신월리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에 제주도로 출동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군인들은 동족상잔을 반대하며 이는 군인의 사명에 부합하지 않는다면서 제주도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했다.군인들의 봉기는 한국전쟁 이후 미군정에서 이승만 정권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사회적으로 불만이 고조됐던 당시 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여수에서 시작된 봉기는 순천을 비롯한 전남 지역으로 확대됐고 전북과 경남 일대까지 그 영향이 이어졌다. 이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지역민이 희생됐다.당시 정부는 경찰은 물론 육군·해군·공군을 총동원해 봉기가 일어난 일대를 초토화했다. 우리나라 역사상 첫 비상계엄도 이때 선포됐다. 무차별적인 진압 작전이 펼쳐지면서 1만여 명이 희생됐고, 수많은 마을이 불타 사라졌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됐으며, 살아남은 이들조차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을 안고 연좌제의 고통 속에 숨죽여 살아야 했다. 여순사건국가폭력으로 인정됐지만…2003년 노무현 정부 시절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여순사건을 국가폭력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사과도, 보상도, 기념사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유족들은 법적 투쟁을 통해 받은 배·보상금으로 건물을 매입해 지난 2020년 ‘여순항쟁역사관’을 문 열었다. 순천종합버스터미널 옆에 위치한 이곳은 낡은 건물에 입구도 좁고 초라하지만 이곳에 담긴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여순10·19특별법제정범국민연대 소속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참여해 여순항쟁 역사 검토 과정을 거쳐 자료를 수집해 놓은 이곳은 여순사건을 깊이 있게 알 수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역사관이다.사건이 벌어진 지 73년 만인 지난 2021년 6월, 여순사건 특별법이 제정됐다. 그러나 이후 4년 동안 진상조사, 보상, 명예회복 등의 조치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여순항쟁역사관에서 만난 박소정 여순10·19범국민연대 운영위원장은 “껍데기뿐인 특별법”이라고 비판했다.최근 극우 성향 역사교육단체인 리박스쿨 논란이 일었던 가운데, 리박스쿨에서 출간한 교과서에 “여순사건은 암세포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며 이승만 정부를 미화하면서 유족들의 분노를 샀다. 역사를 왜곡하고 국민을 ‘암세포’로 규정한 정부에 대해 유족들은 “우리는 암세포가 아니다”라며 절규했다. 현재도 이어지고 있는이념 논쟁의 시작이승만 정부는 여순사건을 두고 “전라남도 현지 좌익분자들이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일부 군대를 선동해 일으킨 것”이라고 발표했다. 당시 국방부에서도 “소련 제국주의의 태평양 진출 정책을 대행하려는 공산당 괴뢰정권의 음모”라고 규정했다.이를 계기로 정부에서는 전국의 학교, 언론계, 문화계 등 지식인을 대상으로 좌익분자, 소위 ‘빨갱이’를 색출하기 시작했고, 이들을 관리·통제하고 전향시킨다는 목적으로 국민보도연맹을 만들었다. 국민보도연맹은 이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대대적인 학살을 당하는 비극을 낳았다. 정부가 정권 유지를 위해 만든 단체를, 국가가 위기가 닥치자 국민을 버리고 대량 학살한 것이다.뿐만 아니라 이승만 정부는 대통령을 총재로 한 대한청년단과 학도호국단을 창설하는 등 반공 국가 체계를 강화해 나갔으며, 국민의 일상과 사상을 감시할 목적으로 유숙계(숙박 명부 작성), 연좌제 등을 실시했다. 이러한 행위를 뒷받침한 것이 여순사건이 일었던 당시 제정된 국가보안법이다.여순사건이 과거의 역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여전히 한국 사회에 남아 있는 이념 논쟁의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정부를 비판하고 반대하는 목소리에 대해 ‘좌파’, ‘빨갱이’, ‘종북 세력’, ‘반국가 세력’ 등으로 치부하는 것은 과거 여순사건 당시의 이승만 정부가 자행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지금도 여순사건을 ‘이념’ 문제로 보는 정치적 시각이 팽배한 상황에서 박소정 위원장은 “여전히 여순사건을 왜곡하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며 “이념이 아닌 생명과 평화의 관점으로 이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여순항쟁의 진실을 규명하고 희생자와 유족들의 명예 회복을 완성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이념을 넘어 미래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잊혀가는 아픈 역사의 흔적희생자 유가족의 상처와 침묵, 그리고 국가의 방임 속에 여순사건은 잊혀가고 있다. 여순항쟁이 일었던 지역 곳곳은 아파트 단지, 상권, 관광지로 개발됐고 아픈 역사의 흔적은 사라졌다. 관심 갖고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대규모 학살이 있었던 오동도 역시 수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찾고 있지만, 여순사건에 대한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정표나 관광 안내도에도 여순사건기념관은 찾을 수 없고, 여수세계박람회(엑스포) 유치 기념관 내 한 곳에 작은 공간이 마련돼 있을 뿐이다.여순사건 희생자 유족들과 시민단체, 그리고 일부 정치권에서는 “여순사건은 무고한 민간인들이 희생당한 아픈 역사로, 희생자들에 대한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국가적 과제”라며 “여순사건위원회는 오직 진실과 중립성에 근거해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고 정치적 편향이나 이념적 왜곡을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공동취재팀(낭주신문 장정안 기자, 태안신문 김동이 기자, 주간함양 임아연 기자)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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