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 새벽 안개는 낯선 풍경이지만, 요즘 앞마당을 나서면 수묵화에서나 볼 듯한 안개가 엄천골짝 법화산 너머로 부옇게 흘러가고 있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은 여전히 미약하고, 습기 가득한 공기 속에선 어제와는 또 다른 하루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나는 습관처럼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이 무거우면 마음도 저절로 눅눅해지고, 맑게 갠 하늘엔 잠시나마 가벼운 한숨을 실어 본다. 그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만큼은, 내 삶의 많은 고민들이 잠시 멈춘 듯하다.이상기후라는 이름의 낯선 손님이, 이제는 수시로 불쑥 찾아와 당황하게 한다. 장마가 끝났다는 기상청의 말이 무색하게, 며칠째 쏟아진 폭우에 전국이 아수라장이 되었는데, 지난 3월 산불로 난리가 났던 이웃 산청은 전 군민 대피령이 내려질 정도로 피해가 심각했다. 예전엔 비가 오면 오랜만에 쉬어간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요즘은 비가 그치지 않을까 봐, 산사태가 날까 봐 늘 조마조마한 마음을 안고 하루를 보낸다.기후의 변덕은 내 마음속 풍경도 바꾸어 놓았다. 불안한 마음에 날마다 안절부절하다가, 어쩌다 해가 뜨면 그 햇살에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든다. 이젠 자연이 내 뜻대로 흘러주길 바라는 마음보다, 어떻게든 변화에 적응하고 살아남을 방법을 먼저 고민한다.오래전, 계절은 어느 정도 약속을 지키곤 했다. 봄이면 산벚이 피고, 여름이면 장마가 와서 잠시 쉬었다 가고, 가을 햇살 아래 과일이 영글었다. 한 계절을 보내면 또 다음 계절이 조용히 찾아오고, 그 흐름을 믿는 일이야말로 농부에게 주어진 큰 위로였다.
하지만 이제 계절은 자주 방향을 잃는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괴물이라는 수식어까지 붙은 폭우, 끝없이 이어지는 폭염, 바람조차 생경하게 느껴지는 요즘의 날씨, 모든 것이 당연했던 농부의 시간에 ‘불확실’이라는 단어가 깊게 자리를 잡았다.농부에게 기후란, 작은 신음 하나까지 귀 기울여야 하는 생명체다. 감나무 한 그루, 그 아래 자라나는 풀 한 포기조차도 하늘의 변화에 민감하다. 과습에는 꼭지 불량이 생기고, 일조량이 부족하면 단맛이 줄어든다. 37도 불볕에 열매가 화상을 입는 모습을 보면, 자연의 섭리가 얼마나 섬세한지 다시 깨닫게 된다.하지만 농부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는다. 땅의 섭리에 순응하면서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다. 어쩌면 농부의 지혜란, 이 불확실한 세계에서 ‘내려놓음’과 ‘마음 챙김’ 사이를 오가는 사색의 시간일지도 모른다. 농사는 결국,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자연을 하루하루 성실하게 마주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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