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동족상잔의 아픔을 가진 대한민국. 75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지만 그 아픔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전남 영암, 충남 태안, 경남 함양 등의 민간인 희생자들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 혹은 한국군에 의해 아무런 이유 없이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이웃이 이웃을 죽이는 비극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사과와 추모, 용서 없이 75년이라는 시간을 흘려보낸 채 살아오고 있다. 이에 낭주신문·태안신문·주간함양은 공동취재팀을 구성해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을 가진 대전 골령골과, 여순사건의 아픔이 서린 전남 여수·순천, 4.3의 아픔을 간직한 제주 평화공원, 그리고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찾아 민간인 학살 피해지역의 실상과 피해자 유족의 이야기를 담고자 한다.이를 통해 억울하게 희생된 민간인 희생자들의 명예 회복 방안을 모색해 본다.
“우리는 오직 한 가지, ‘진실’이라는 단 하나의 염원을 품고 이 긴 세월을 버텨왔다. 사랑하는 이들이 왜,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 의해 죽임을 당했는지, 그 처참했던 순간의 진실을 밝히고, 국가폭력에 의해 짓밟힌 그분들의 명예를 되찾아 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이자, 희생된 영령들께 바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라 믿었다. 그러나 제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의 행태는 여전히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고 있다. 벅차오르던 희망은 잔인한 실망과 분노로 변해, 우리의 가슴을 또다시 찢어놓고 있다. 진화위는 진실을 밝히는 위원회가 아니라 진실을 가로막고, 이미 피와 눈물로 어렵게 밝혀낸 진실마저 봉인하려 하고 있다.”전미경 대전 산내사건 희생자 유족회장의 절규이자 외침이 제75주기 제26차 피학살자 합동위령제가 열린 지난 6월27일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 ‘골령골’에 울려 퍼졌다.2020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2기 진화위는 지난 5월26일 공식 조사 기간을 종료했다. 하지만 전체 사건 2만924건 중 56.9%인 1만1908건만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고, 10.1%(2116건)는 ‘조사 중지’, 3.2%(679건)는 ‘진실규명 불능’으로 종결했다.공교롭게도 이날 합동위령제에 이틀 앞선 6월25일에는 제2기 진화위의 박선영 위원장이 골령골을 찾았다. 박 위원장이 이날 골령골을 찾은 이유는 과거 국가폭력과 전쟁 과정에서 희생된 민간인 및 군경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한 진화위의 권고에 따라 대전시 동구에서 추진 중인 위령시설 사업의 동력을 높이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밝히고 있지만 공동취재팀이 지난 5일 찾은 골령골에서는 박 위원장의 현장 방문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골령골로 향하는 도로변과 합동위령제가 열린 골령골에는 합동위령제를 알리는 현수막과 함께 ‘희생자 두 번 죽이는 박선영 진화위원장, 골령골 꼼수 방문 웬말이냐!’, ‘박선영 위원장, 진실화해위원회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라!’, ‘내란 옹호, 역사왜곡, 조사사건 묻지마 보류! 박선영 진화위원장은 무슨 염치로 산내 골령골을 찾는가!’ 등 박 위원장을 겨냥한 비난의 현수막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이들 유족들이 이렇게 반발한 이유는 박 위원장이 그동안 극우적 역사관과 역사왜곡 발언을 한 점에 더해 이날 대전에서 열린 6.25전쟁 75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뒤 골령골을 찾았기 때문이다. 골령골 민간인 희생자들의 가해자가 국가였고 국군이었기 때문에 유족들의 강한 반발을 산 것이다.
박 위원장이 찾은 ‘골령골’은?
그렇다면 유족들의 반발에도 박 위원장이 골령골을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대전시 동구 낭월동에 위치한 산내 골령골은 한국전쟁 시기 수많은 민간인 희생 사건이 발생한 장소로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1950년 6월28일부터 7월17일까지 20여 일간 법적 절차 없이 보도연맹원과 대전형무소 재소자 등 최소 1800명 이상, 최대 7000여 명의 민간인들이 집단 학살당해 암매장된 비극의 현장이다.이승만 정부는 1950년 9월 말 북한군이 퇴각하자 민간인 수 천 명을 부역혐의(비상사태하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 위반혐의)로 대전형무소에 수감했고, 이들 중 일부를 산내 골령골로 끌고 가 총살했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에도 여순사건 관련자들이 골령골에서 총살당했다.골령골에서 희생된 민간인들을 살해한 가해자는 충남지구 CIC(방첩대)와 제2사단 헌병대, 대전지역 경찰 등이다. 이들은 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이 북한군 남하 시 북한군이 형무소 정치범들을 석방하거나 정치범들이 북한군에 동조할 것을 우려해 이들을 법적 절차 없이 집단 살해했다. 당시 미군은 학살 현장을 참관해 학살을 지원 또는 묵인, 방조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골령골에는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자 위령시설 및 평화공원(가칭 진실과 화해의 숲)’이 들어설 예정이다. 2010년 12월 발굴 유해의 안정적인 안장을 위해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 권고에 따라 589억 원 규모의 국비사업으로 평화공원 사업이 추진 중이다.지난 2016년 위령시설과 평화공원 부지로 골령골이 선정된 이후로 10년 가까이 조성이 미뤄지고 있는데, 지난해 토지 보상과 타당성 재조사도 모두 완료돼 유족들은 하루빨리 착공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에 박 위원장이 골령골을 찾아 대전동구청으로부터 평화공원에 대한 추진상황 보고 청취에 나선 것이다.이날 박 위원장은 “평화공원은 희생된 분들의 넋을 기리고, 유가족의 상처를 치유하며, 더 나아가 국민통합과 화해를 도모하기 위해 반드시 추진되어야 할 사업”이라며 “사업이 조속히 추진될 수 있도록 내년도 예산 반영 등을 진화위 차원에서 기획재정부에 적극 건의하겠다”고 밝혔다.
‘진실과 화해의 숲’ 내년 1분기 첫 삽
그렇다면 산내 평화공원, 가칭 ‘진실과 화해의 숲’ 조성사업은 어디까지 진행됐을까.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전국단위 위령시설 조성사업’은 지난 2015년 행정안전부 전국 공모사업에 선정되며 2018년 설계용역을 시작으로 추진됐으나, 건축 자재의 물가 상승과 사업부지 보상비 부족 등으로 지연돼 어려움을 겪어왔다.그러던 중 지난해 12월9일 열린 기획재정부의 ‘2024년 제8차 재정사업평가위원회’를 통해 타당성 재조사를 통과하며 사업 추진에 탄력을 받게 됐다. 예산도 기존 478억 원에서 589억 원으로 111억 원이 늘었다.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시설은 과거사 문제를 치유하고 평화와 화해의 상징 공간으로 조성될 예정인데, 조감도에 따르면 추모관과 유적공원, 유해가 봉환되는 기억의 숲, 추모시설, 추념광장, 화해마당, 생태주차장, 치유의 길, 추모의 길, 희생의 길 등이 조성된다.지난 6월27일 합동위령제에 보낸 추도사에서 박희조 대전 동구청장은 내년 첫 삽을 뜨게 되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전국 단위 위령시설(진실과 화해의 숲)’ 조성에 만전을 기하겠다는 뜻을 전했다.박 청장은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었던 골령골에 전국 단위 위령시설을 조성하게 된 것은 진실의 꽃을 피워 평화의 터전을 세우기 위함”이라며 “전국 단위 위령시설이 ‘죽음의 기억’이 아닌 ‘생명의 약속’으로 국민 마음 속에 자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산내 평화공원을 담당하는 대전 동구청 공원녹지과 관계자는 “산내 골령골 평화공원의 예산은 589억 원으로 최종 결정됐고, 현재 내년 착공을 위해 설계가 진행 중”이라며 “내년 1분기 중 착공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대전 동구청은 협약에 따라 공사만 하는 역할을 하고 실질적인 총괄은 행정안전부에서 유족들과의 협의나 유족들의 의견을 수렴해 반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세종 추모의 집에 임시 안치된 민간인 희생자 유해,
평화공원 안치 시 화장해 합동 안장? 유족들 반발
한편 산내 골령골 평화공원이 조성되면 이장할 4000여 구의 민간인 희생자 유해가 현재 세종 추모의 집(세종시 전의면)에 임시 안치돼 있는 가운데, 화장 후 합동 안장하겠다는 정부의 계획에 유족들이 반발하고 있다. 이에 (사)대전산내골령골피학살자유족회는 ‘민간인 학살 희생자 발굴 유해 화장 반대 서명운동’을 골령골을 방문한 추모객들을 대상으로 벌이고 있다.유족회는 “현재까지 전국 각지에서 발굴된 민간인 희생자 유해 4000여 구는 세종 추모의 집에 임시 안치되어 있고, 산내 골령골에 평화공원이 조성되면 이전할 예정”이라며 “하지만 정부는 골령골로 이장하면서 화장한 후 지역별로 합동 안장할 계획”이라고 전했다.하지만 유족회는 “유족들은 화장 계획에 반대한다”면서 그 이유로 “화장은 민간인 학살의 증거를 지우는 일이며, 신원을 확인하고자 염원하는 유족들의 희망을 꺾는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모든 유해를 발굴된 상태로 평화공원에 안장할 것을 촉구한다”면서 “민간인 학살 희생자 발굴 유해 화장을 절대 반대한다. 발굴된 유해들을 온전한 상태로 봉안하라”고 요구했다.공동취재팀(태안신문 김동이 기자, 낭주신문 장정안 기자, 주간함양 임아연 기자)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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