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은퇴 목사님께서 아무리 봐도 죽음을 앞두신 것 같았다. 얼마 전까지도 건강하셨는데 무척 당황스러웠다. 늘 지혜로우시고 은사가 충만하셨던 분이셨다. 활동도 왕성하시고 삶의 애착 또한 남다른 분이셨다. 오랫동안 운동으로 다져진 몸은 얼마나 자기 관리에 철저했는지 충분히 보여줬었다. 그러했기에 죽음은 너무 갑작스럽고 어울리지도 않았다. 나는 목사님을 위해 기도했다. 감사함으로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시간을 충분히 주십사고. 잘 준비된 마음으로, 평생 달려왔던 순간순간을 놓치지 않고 귀하게 황금 보자기에 잘 싸서 가져가시라고.한편 나의 마지막 시간도 생각해보았다. 유언장을 앞에 둔 사람인 양 미리 그려보았다. 모든 좋고 특별한 것들이 줄을 지어 나의 인생에서 작별을 고할 것이다. 깊고 오랜 기도 시간, 은혜가 사무쳤던 찬양 시간, 마음이 건강한 자들만이 할 수 있는 위트와 호탕한 웃음, 돈이 없어도 쪼그라들지 않았던 소망 넘치던 삶의 여유들도 떠나갈 것이다. 이것이 다가 아닐 것이다. 홀로 고립될까 봐 불안하고, 제법 깊다고 생각했던 믿음과 신뢰가 뿌리까지 흔들릴 것이다.언젠가, 고왔던 얼굴에 검버섯이 피기 시작했을 때, 키우던 병아리를 눈앞에서 물고 아무 표정 없이 가버렸던 고양이가 생각났다. 그 고양이는 평소 이것저것 먹을 것을 주며 예뻐했던 터라 “병아리는 너 줄게 아냐!” 호되게 야단을 퍼붓는 나를 이해 못 하는 눈치였다. 어이가 없었지만 막을 수가 없었다. 검버섯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보통 대부분 사람은 갑자기 죽지 않는다. 끝내 마지막 숨을 내쉴 때까지 온갖 좋은 것들과 서서히 이별을 계속해야만 한다. 자녀들을 흩어 보내며 작별해야 하고, 바라만 봐도 절로 웃음이 나던 친구들과도 작별해야 한다. 맹렬히 달리며 성취해왔던 잘 단련된 성공하는 습관들과도, 과녁을 꿰뚫던 정확함과 민첩함과도…. 우리의 흐트러짐은 그 끝없음이 상상 이상일 것이며, 너무나 당황스럽고 잔인하기까지 할 것이다. 어릴 때 미국 영화를 보면 대체로 죽음을 무서워하거나 거부함 없이, 심지어 코믹하게 받아들이기까지 하는 태연한 모습들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때 우리 문화는 죽음이란 받아들이기 너무 어려운 슬프고 억울한 고통 중의 고통이었기 때문이다.간혹 어떤 사람은 죽음 앞에 잘 준비된 사람도 있다. 죽음을 친숙히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평소에 이별의 아픔을 잘 관리한다면 ‘덕분에 난 너무 행복했습니다. 천국에서 만나요!’라고 말하며 삶의 끝에서조차 평온할 것이다. 나도 이런 결말을 원해왔다. 하지만 실제로 나에게 죽음의 씨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면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피하고 싶고 조금이라도 더 미루고 싶어질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그때의 나에게 조용히 이 말을 남기고 싶다.‘담담하게 이삿짐을 꾸려라. 의미 없이 오래오래 사는 것만이 다가 아니야.’ 그리고 ‘삶의 마무리는 꼭 아름다워야만 하는 것도 아니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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