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 1000m 이상의 함양 15개 명산을 오르는 ‘초보 등산러의 함양 산행일기’를 연재하고자 한다. 주간함양 김경민 기자가 직접 함양의 명산을 오르고 느끼면서 초보 등산러의 시각으로 산행을 기록한다. 해당 연재로 천혜의 자연 함양 명산에 흥미를 가지는 독자들이 늘어나길 기대해 본다. <편집자 주>
지난 2월, 도숭산 정상에서 맑게 드러난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았다. 머나먼 그 산줄기를 눈으로 좇으며 ‘다음 산행은 저곳이다’라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3월과 4월, 갑작스레 터진 대형 산불은 전국 곳곳의 산줄기를 위협했고, 산청 일대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지리산도 예외는 아니었다. 산불로 인해 입산이 전면 통제되었고, 천왕봉을 향한 계획은 기약 없이 미뤄졌다. 몇 차례나 배낭을 꾸렸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한 끝에, 5월이 되어서야 산은 다시 사람을 맞이했다. 그 기다림의 무게만큼 이번 산행은 특별했다.
지리산. 높이 1915m, 대한민국에서 한라산 다음으로 높은 산이며, 남한 본토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다. 백두대간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으며, 국내 육상 국립공원 중에서도 최대 면적을 자랑한다. 남과 북의 산줄기를 잇는 이 마지막 산은, 그 자체로 지리적, 문화적 상징성이 크다. 백무동 코스는 이 지리산을 대표하는 고전적 탐방로다. 등산로 입구에서 장터목을 거쳐 천왕봉까지 왕복 15km, 약 11시간이 소요되는 긴 여정이다.
5월25일, 총 세 명의 산행팀은 이른 아침부터 마천면에 위치한 백무동탐방지원센터로 향했다. 폭포 소리를 들으며 도착한 시간은 오전 8시25분. 하늘은 청명했고 숲은 초록으로 가득했다. 겨울에 두 차례 오른 이 코스를 봄에 다시 걷는 것은 처음이었다. 눈이 없는 지리산, 초록으로 덮인 천왕봉 능선은 또 다른 얼굴로 다가왔다. 특히 이번은 팀 전원이 식량과 장비를 완벽히 갖춘 산행이었다. 민족의 영산 앞에서의 마음가짐은 언제나 각별하다. 단순한 등산이 아니라 무언가를 치르는 의식처럼 느껴졌다.
천왕봉을 향한 세 번째 길초입부터 ‘지옥의 돌계단’이 시작된다. 2시간가량 이어지는 급경사 돌길과 돌계단. 매번 느끼지만, 백무동~소지봉 구간은 처음부터 고도를 급격히 끌어올리는 힘겨운 코스다. 하지만 울창한 수림과 흙내음, 바람소리가 발걸음을 지탱해 준다. 2.6km 지점에서 참샘을 만났다. 현재 물을 마실 수는 없지만, 시원한 물줄기만으로도 지친 이마와 손을 식히기에 충분했다. 샘을 지나면서부터 길은 더욱 가팔라졌고, 숨이 목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마침내 소지봉 능선에 오르니 넓게 펼쳐진 하늘과 완만한 흙길이 여정을 반겨주었다.
소지봉~장터목 구간은 이전보다 훨씬 수월하다. 산죽밭과 소나무숲 사이를 걷다 보면, 망바위에 다다르게 된다. 이곳에서는 반야봉과 능선이 한눈에 들어오며, 조용한 숲 속 바람에 땀마저 식는다. 장터목까지는 돌계단과 목재계단이 이어지며 다시 고도를 올리지만, 이미 몸은 어느 정도 산에 적응한 상태였다. 오전 11시40분, 장터목대피소 도착. 예상보다 30분이나 빠른 시간이었고, 모두가 큰 탈 없이 꾸준히 올라온 덕분이었다. 대피소는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천왕봉을 갔다 온 사람들, 하루를 묵으려는 이들, 혹은 우리처럼 잠시 쉬었다 다시 정상으로 향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점심은 김밥과 라면. 따뜻한 국물이 몸을 풀어주고, 햇빛에 말린 옷은 서서히 뽀송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긴장이 엄습했다. 대피소의 고도는 이미 1650m. 바람은 세찼고, 땀에 젖은 옷 사이로 찬 기운이 스며들었다. 정상까지는 1.7km 남짓. 그러나 가장 가파른 오르막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터목에서 천왕봉까지는 제석봉과 고사목 지대를 지난다. 산죽과 바위가 교차하며, 바람은 더욱 거세어진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느리지만 묵직하다. 고개를 들면 하늘이 가까워지고, 어느 순간 ‘통천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통천문은 ‘하늘로 통하는 문’이라는 뜻을 가진 마지막 바위문. 이곳을 통과하면 지리산 정상이 바로 눈앞이다. 오후 1시35분, 마침내 천왕봉 정상에 도착했다.
‘한국인의 기상이 여기서 발현되다’라는 글귀가 새겨진 비석이 당당히 서 있다. 그리고 그 옆, ‘천주(天柱)’.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란 뜻으로, 남명 조식 선생이 남긴 글이다. 산을 오르며 지나친 수많은 바위와 나무, 흙과 바람은 모두 이 순간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정상에 서서 발 아래 펼쳐진 풍경을 내려다보며, 인간은 얼마나 작은가, 또 얼마나 용감한가 생각하게 된다.
무릎이 전해준 산의 무게그러나 산행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제는 하산이다. 지리산의 백무동 하산길은 결코 녹록지 않다. 천왕봉을 내려와 다시 장터목대피소에 도착했을 무렵부터 오른쪽 무릎에 통증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올라갈 때는 견딜 만했지만, 내려가는 동안 무릎에 무리가 왔고, 장터목에서 소지봉으로 이어지는 급경사 돌계단 구간에 이르자 통증은 본격적으로 깊어졌다.
결국 나는 팀원들보다 점점 뒤처졌다. 하산길의 절반가량을 홀로 내려오게 되었다. 동행들과 속도를 맞추기 어려웠고, 걷는 내내 한쪽 다리에 쏠리는 체중을 분산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매번 디딜 때마다 무릎에 전해지는 압박은 적지 않다. 경사로의 끝없는 반복은 인내심을 시험했다. 이 경험을 통해 다시금 느꼈다. 무릎보호대는 이 코스를 오르는 모든 이들에게 필수 장비라는 것을. 특히 하산길의 돌계단은 무릎에 지속적인 부담을 주며, 아무 준비 없이 오르기엔 그리 만만한 산이 아니었다.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한 발씩 내딛었다. 어느덧 소지봉을 지나 참샘을 지나고, 눈앞에 익숙한 백무동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오후 5시50분, 백무동탐방지원센터 도착. 모두가 무사히 돌아왔고, 지리산은 다시 우리를 품어주었다. 몸은 지쳤지만 마음은 충만했다. 그리고 분명히 알게 되었다. 지리산은 다녀오는 데 그치지 않고, 다시 생각하게 하고 또다시 부르는 산이라는 것을.
지리산은 이름처럼 오래된 뜻을 품은 산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지혜로운 이인(異人)의 산’이라는 의미에서 지리산(智異山)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러나 옛 문헌에 다양한 기록이 있어 순우리말 어원을 가진 지명이라는 주장도 있다. ‘지리하다(지루하다)’에서 왔다는 설도 있고, 고대어 ‘달(達)’이 변화해 ‘지리’ 혹은 ‘두류’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도교적 색채로 ‘방장산(方丈山)’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 광대한 산에는 1600여 종의 식물이 자생하고, 반달가슴곰이 85마리 이상 서식한다. 천왕봉을 주봉으로 수많은 봉우리가 이어지고, 오랜 세월 인간과 함께해 온 고찰과 문화유산이 곳곳에 숨어 있다. 이성계의 왜구 토벌지였으며, 한국전쟁 이후 빨치산 토벌의 역사와 아픔도 이 산에 깊게 새겨져 있다.
그래서일까. 지리산은 언제나 무게가 있다. 단순한 등산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와 정신을 따라 걷는 일. 이번 백무동 산행은 그런 점에서 더욱 의미 깊었다. 자연의 경이로움, 역사적 맥락, 그리고 동행한 이들과의 깊은 유대가 어우러져 또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지리산. 그 이름은 오르고, 바라보고, 다시 내려와도 여전히 위대하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그 품을 그리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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