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죽음을 약속받는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 2018년부터 우리는 의미있는 선택 하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삶의 마지막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 바로 ‘연명의료결정제도’이다. “혹시라도 내가 아파서 누워 있으면 남은 자식들이 고생만 하겠지. 늙은 ‘할망구’ 병수발하는 우리 새끼들 모습 상상만 해도 싫어. 나는 살 만큼 살았으니 괜찮아” 함양군보건소에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한 한 할머니는, 마치 오래된 숙제를 끝마친 사람처럼 홀가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할머니가 작성한 의향서는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되면서 가능해졌다. 회생 가능성이 없는 말기 환자가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거부할 수 있도록 돕는 제도이다. 흔히 어르신들 사이에서 ‘안락사 신청’이라는 말로 통용되지만 ‘존엄사’(치료 불가능한 환자의 자연적인 죽음)가 맞는 표현이다. 누구나 자신의 마지막이 고종명(考終命)이길 바란다. 유교에서 말하는 오복 중 하나로, 병이나 사고 없이 평온하게 생을 마감하는 것은 예로부터 큰 복으로 여겨졌다. 의료기술의 발달은 분명 소중한 생명을 구하는 큰 힘이 되었지만, 때로는 의식 없이 병상에 누운 채 기계로 간신히 연명하는 삶을 낳기도 한다. 그런 삶이 과연 환자와 보호자 모두에게 축복일 수 있을까?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진지하게 머물러야 한다. 최근 들어 함양군 어르신들 사이에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는 흐름이 하나의 작은 물결처럼 번져가고 있다. 남은 가족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경로당에 계신 할머니 한 분이 보건소에서 의향서를 작성한 뒤, 그 이야기가 입소문을 타고 퍼졌다. 그러자 어르신들이 서로 손을 잡고 함께 함양군보건소를 찾아와 의향서를 쓰는 모습으로 이어졌다. 그들의 얼굴에는 두려움보다는 평온함과 홀가분한 미소가 스며 있다. 어쩌면 우리는 ‘죽음’이라는 운명 앞에 지나치게 엄숙하고 무겁게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함양군보건소에서는 지난해부터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상담과 등록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약 480명의 어르신들이 이 고귀한 결정을 내렸고, 그 순간마다 이연희 상담 간호사가 함께했다. “어르신들이 오셔서 가장 먼저 말씀하시는 건 ‘내가 결정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거예요. 막상 문서를 작성하려 하면 마음이 무거워지고, 겁도 나는 게 사실이죠. 그래서 최대한 따뜻하게, 천천히 설명해드려요” 연명의료결정제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19세 이상 성인이 미래의 임종 상황을 대비해 자신의 연명의료 중단 의사를 문서로 남기는 것. 반면 연명의료계획서는 말기 환자나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가 의료진과 논의 후 본인의 뜻을 기록하는 문서다. 종종 사람들은 의향서를 작성하면 의료행위가 즉시 중단된다고 오해한다. 이에 대해 이연희 간호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의향서는 단지 본인의 선택을 나타내는 문서일 뿐, 곧바로 어떤 조치를 취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의사의 판단하에 회복 가능성이 없고 임종이 임박했을 때 비로소 연명의료 중단 결정이 고려됩니다. 연명의료 중단에는 심폐소생술, 혈액투석, 항암치료, 인공호흡기 착용 등이 포함되지만, 통증 완화, 영양과 수분 공급, 산소 투여 같은 기본적 치료는 계속됩니다” 의향서를 작성한 어르신들 중에는 가족이 없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본인의 의지가 담긴 문서가 있다면 연명의료 중단 결정이 가능하다. “자식이 없는 분들도 계세요. 오히려 더 결연한 마음으로 오세요. ‘나는 혼자니까 미리 준비해둬야지’라고 하시면서요. 그 모습이 참 짠하면서도 멋져요” 가족을 위해 의향서를 작성했다가 자식들의 반대로 결국 철회하는 경우도 있다. “지금까지 480여 분이 작성하셨고, 취소한 분은 2명 정도예요. 한 어르신은 작성 후 자식들이 알게 되자 함께 와서 취소하셨어요. 자식 입장에선 부모가 마지막을 준비한다는 말 자체가 가슴 아플 수 있죠. 그래도 이 제도는 죽음에 대해 가족 간의 대화를 여는 계기가 되기도 해요” 끝으로 이연희 간호사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대해 깊은 공감과 긍정적인 평가를 전했다. “저는 이 제도를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있어요. 죽음을 내 스스로 받아들이고 결정할 수 있다는 건 굉장히 고귀한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만약 의식 없이 의미 없는 치료만 계속된다면, 그 자체가 오히려 더 큰 고통일 수 있잖아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모든 가능한 치료가 끝난 뒤, 비로소 내릴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에요. 그런 점에서 저는 오히려 마음이 편안합니다. 실제로 저도 이미 의향서를 작성해 두었어요” 함양읍에 거주하는 한 할머니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러 온 이유를 이렇게 털어놓았다. “동네 사람들이 다들 했다길래, 나도 그냥 한 번 와봤어요. 솔직히 말하면 내가 죽는 건 하나도 안 무서워요. 오히려 남은 우리 자식들이 더 걱정이지. 병원비에 시간까지 뺏기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나도 미리미리 준비해야죠. 내 걱정보다 자식들 걱정이 먼저예요” 또 다른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가족도 중요하지만, 내가 정신이 없는데 계속 치료만 받는다면 그게 얼마나 고통스럽겠어요. 의미도 없는 치료로 그냥 생명만 연장하면, 그건 정말 더 힘들기만 할 것 같았어요. 몸도 마음도 움직일 수 없는 채로 하루하루 버텨가는 삶은, 저한테는 너무 큰 고통일 것 같아서 결심했죠” 또 다른 어르신은 담담하게 말했다. “뭐, 저거 쓴다고 당장 죽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사람이 어떻게 죽을지 누가 알아요? 그래서 그냥 마음 편하게, 하나 준비해두자 싶어서 작성했어요” 과연 내가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을까? 누구나 한 번쯤은 뻔한 질문을 던져본다. 언제까지일지 알 수 없는 남은 시간 속에서, 단 하루는 반드시 ‘마지막 날’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갈 인생을 고민하듯, 언젠가 마주할 그 끝에 대해서도 마음속 어딘가에 품고 있어야 한다. 기자는 지난해 부모님 두 분 모두를 떠나보냈다. 병마와의 싸움 속에서 점점 쇠약해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고, 주삿바늘로 멍든 부모님의 손등을 보며 수없이 가슴이 무너졌다. 어느 날 의사는 말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인공호흡기를 착용하면 시간을 조금 더 벌 수는 있지만, 부모님이 많이 힘드실 겁니다” 마치 사형선고 같았던 그 말 앞에서, 의식이 없는 부모님 곁에 앉아 흐느꼈다. 긴 호흡 끝에 간신히 붙잡고 있는 생명에, 더 이상의 고통을 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때 사전연명의료의향서라는 제도가 조금 더 우리 곁에 가까이 있었다면, 마지막 시간을 덜 아프게 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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