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1년부터 1796년까지 안의현감을 지낸 바 있는 연암 박지원은 조선 후기 실학을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문장가이다. 그는 1780년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을 축하하기 위한 사행단에 동행하였다. 심양(瀋陽), 북경(北京), 열하(熱河) 등지를 두루 방문하고, 그 여정에서 보고 들은 바를 기행문 『열하일기』에 남겼다.   이 저작은 당시 조선 지식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오늘날에도 최고의 고전 중 하나이자 동아시아 지성사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주간함양은 『열하일기』의 주요 무대를 직접 답사하고, 연암의 사유를 비추어볼 수 있는 충남 당진 지역까지 발길을 옮겨 그의 정신과 흔적을 되짚어 본다.이번 기획 연재는 연암 박지원의 여정을 따라가며, 그가 머문 장소와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오늘날의 풍경 속에서 그의 흔적을 조심스레 더듬어보려는 시도다.그가 바라본 세계가 지금 이 시대에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들을 조용히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1) 연암, 조선을 넘어 청나라로(2) 심양에서 만난 사람들, 필담으로 엮은 우정(3) 고독을 외치다, 역사의 벽을 만나다(4) 최종 목적지 열하에 도달하다(5) 연암 안의현감으로 부임하다(6) 마지막 관직 활동의 흔적 면천   1780년, 조선의 실학자 연암 박지원은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로 향하는 사절단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는 청나라의 제6대 황제 건륭제의 칠순을 축하하기 위한 길이었고, 이 여정은 후일 『열하일기』라는 방대한 기록으로 남았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외교 사행이나 이국 풍물기에 머무르지 않았다. 연암의 사유는 ‘집’을 떠나 ‘타자’와 마주하며, 조선이라는 체제와 문명의 근본을 다시 묻는 철학적 탐색의 길에 들어선 것이었다.박수밀 한양대 교수는 “연암이 사행길에 나선 것은 단지 공식 임무 수행 때문이 아니라, 내면의 사유를 확장하고자 했던 실천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연암에게 ‘집’이란 반복된 경험과 사고가 쌓여 편견으로 굳어진 세계였다. 그 편견을 깨기 위해 그는 몸소 타자의 세계로 걸어 나갔다”고 설명했다.열하일기는 그런 의미에서 여행기다. 여행은 안락한 보금자리인 ‘집’을 떠나는 행위다. 연암은 이 여정을 통해 조선의 제도와 문화를 상대화하고, 익숙함으로 가려진 삶의 본질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열하일기는 여행기라는 형식 속에 기(記), 소설, 서(序), 한시 등 고전의 다양한 장르가 담겨 있다. 문학 외에도 정치, 경제, 음악, 미술, 건축, 의학, 등 폭넓은 분야에 대한 작가의 식견이 맛깔난 비빔밥처럼 잘 버무려져 있다.이 여행은 외교적 사행의 일환이었다. 연암이 속한 사행단은 ‘진하 겸 사은을 위한 별사’라는 명칭을 지녔다. 진하는 황제의 생일이나 즉위 같은 경사를 축하하기 위한 사행이고, 사은은 청나라로부터 받은 배려나 조치를 감사하기 위한 사행이다. 이 특별한 사행의 목적은 건륭제의 고희를 축하함과 동시에, 1년 전 조선사행의 실수로 북경에서 발생한 화재 사건에 대해 조선에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한 청의 관용에 감사를 표하기 위한 것이었다.사행단의 총 인원은 270명. 『열하일기』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함께 사행을 떠난 노이점이 쓴 『수사록』에는 “압록강을 건넌 사람은 총 270명이고 말은 194필이다”라고 기록돼 있다.연암은 이 사행단에 정식으로 소속된 인물이 아니었다. 사신단의 정사(正使)이자 삼종형(촌수로 8촌이 되는 형)인 박명원의 추천을 받아 ‘자제군관’, 즉 수행원 자격으로 참여한 그는 자신의 신분을 ‘반당’이라 표현한다. 반당이란 삼사가 자비로 데려가는 사람을 뜻하며, 사신단 명단에는 실리지 않은 자유로운 신분이었다. 박 교수는 “연암이 자유로운 관찰자의 위치에서 글을 쓸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와 같은 신분적 특수성이 작용했다”고 짚었다. 책문에서 시작된 사유의 전환여정의 출발점은 압록강이었다. 출국 심사를 마친 사신단은 강을 건너 며칠 뒤, 청나라 접경 마을인 책문에 도착한다. 이 마을은 연암이 처음으로 마주한 타자의 세계였다.책문은 청나라에서도 가장 변두리에 속하는 마을이었다. 사행단은 대체로 이곳을 우습게 여겼다. 허술한 울타리와 대충 박은 말뚝으로 경계를 표시한 모습은 조선 사신들의 눈에 한심하게 보였고, 사행단은 청의 수준을 비웃었다. 조선에 깊이 뿌리내린 북벌 의식, 곧 ‘청은 오랑캐’라는 관념은 양반부터 천민에 이르기까지 국가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던 시기였다.하지만 연암은 달랐다. 그는 책문을 다르게 보았다. 마을의 구조와 생활상을 면밀히 살피던 그는 곧 깜짝 놀란다. 변두리 마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거리에는 수레가 오가고, 길은 곧았으며, 벽돌 담장과 용마루 높은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다. 가장자리마저 이렇다면 중심지는 얼마나 번성할까. 연암은 자신이 품고 있던 선입견을 돌아본다.“견문이 좁은 탓에 질투심이 생겼다”는 고백은 그 인식의 변화가 단순한 감탄이 아니라, 깊은 성찰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는 인간이란 자신이 경험한 세계만을 진리라 여기며, 경험하지 못한 것은 배척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뼈아프게 짚는다. 보고 들은 것이 고정될수록, 동일한 정보를 반복해서 접할수록, 선입견과 편견은 강화된다는 사실을 그는 책문이라는 접경 공간에서 절감한다.연암은 이 경험을 통해 다짐한다. 평등한 눈, 곧 ‘소경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겠다고. ‘소경의 눈’은 단지 시각적 정보에 휘둘리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타자를 대하겠다는 선언이자, 사유의 전환을 상징하는 표현이었다. 이 지점에서 연암은 단지 외국의 풍물을 관찰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내면에 새겨진 문명에 대한 위계적 인식을 해체하는 사유의 전환을 겪는다.그는 이 마을에서 사소하지만 질서 정연한 풍경들에 주목한다. 탁자 위에는 크기가 제각각인 술잔이 놓여 있었고, 손님은 자신이 마시고 싶은 양에 맞는 잔을 골라 술을 따르면 되었다. 술의 양이 아니라 방식이 흥미로웠던 것이다. 또 소, 양, 돼지 등 가축의 종류에 따라 구조가 다르게 짜인 우리들이 있었고, 거름더미와 똥거름조차 정갈하게 정리돼 있었다. 생활 기구는 하나같이 허투루 만들어진 것이 없었고, 모든 도구가 규격에 맞고 있어야 할 자리에 놓여 있었다.이 장면에서 연암은 문득 깨닫는다.“그렇다! 이와 같은 다음에야 비로소 이용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용이 있은 다음에야 후생이 될 것이고 후생이 된 다음에야 정덕, 곧 도덕이 바르게 설 것이다” (『열하일기』 ‘도강록’, 6월27일자)박수밀 교수는 이 구절을 연암 사상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박 교수는 “이 구절에서 이용후생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다. 생활 도구를 이롭게 만들어야 백성의 삶이 넉넉해지고, 그래야 비로소 도덕이 설 수 있다는 사고”라며 “정덕보다 이용후생을 먼저 두는 이 사고는 기존 유학의 사유 체계를 정면으로 뒤엎는 것”이라고 말했다.유학은 도덕과 윤리를 바로 세우는 정덕을 가장 높은 가치로 삼았고, 생산 활동이나 실물 경제는 하위에 뒀다. 조선의 선비들은 실제로 노동을 천시했고, 물건을 사고파는 일을 부끄럽게 여겼으며, 책조차도 사서 읽는 것을 꺼렸다. 하지만 연암은 ‘먹고사는 문제’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청나라의 질서 있고 실용적인 삶의 방식을 보며, 조선의 빈곤과 형식주의를 철저히 대조시켰다.박 교수는 “조선 선비는 실제의 삶보다 형식을 중시했고, 백성의 가난한 삶은 방치되어 왔다. 하지만 연암은 달랐다. 그는 청나라에서 이용후생의 실제 모습을 보고 나서, 정덕과 이용후생의 관계를 더욱 깊이 고민하게 된다”라고 말했다.결국 연암은 도덕이란 백성의 삶 위에 세워질 때만 진정한 가치가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는 정덕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제대로 실현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제시한 것이다. 복지의 바탕 위에 도덕이 서야 한다는 그의 사고는 조선 후기의 경직된 유학 담론 속에서 단연 돋보이는 사유였다. 이용후생, 그리고 오늘날의 질문오늘날 우리는 과연 연암이 말한 그 ‘이용후생’을 이루었을까. 기술은 발전하고 생활은 편리해졌지만, 후생은 누구에게나 평등하지 않다.박 교수는 “오늘날 생활의 도구를 이롭게 하여 경제의 편리함을 추구하는 이용은 충분히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인민의 삶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넉넉해졌다. 그러나 인간성 상실과 인간성 파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커져만 간다”라고 말했다.이어 “이용후생을 실현하고 나면 그 바탕 위에 정덕을 이룰 수 있다고 믿은 연암의 소망은 잘못된 것일까? 그러나 우리 시대의 삶을 생각해보라”며 질문을 던진다.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지고, 부자는 더욱 부유해지고 있다. 다수의 서민은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가며, 내 집 마련이 어려워 결혼을 미루는 젊은이들이 늘어만 간다. 전 국민의 절반은 자기 집이 없다. 고단한 삶이 힘겨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도 종종 일어난다. 이용은 실현되었을지 몰라도 후생은 갈 길이 멀다”고 지적했다.연암은 이용후생을 통해 정덕이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조선의 도덕 중심 질서 안에서 생활의 실질을 앞세운 그의 인식은, 당시로서는 낯설었지만 그만큼 분명한 문제의식이 담긴 것이었다. 열하일기는 그런 연암의 관찰과 사유가 촘촘히 엮인 기록이다. 여행이라는 형식을 빌려 조선을 비춰보고, 세계의 다양함 속에서 자신이 속한 질서를 새롭게 성찰하고자 했던 여정이었다.연암이 건넌 압록강과 책문에서 시작된 길은 곧 심양과 북경을 거쳐 열하로 이어진다. 그곳에서 펼쳐지는 또 다른 사유의 장면들을 따라가 본다.※ 본 기사는 박수밀 교수의 저서 『열하일기 첫걸음』(돌베개, 2020)을 바탕으로 구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