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은 군대해산 이후 덕유산을 근거지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대항하여 대활약을 펼치다 순국한 의병대장 문태서 장군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용맹한 기상을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문태서 의병장 추모사당에서 추모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 주간함양은 전진석 3·1운동 함양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의 <‘덕유산 호랑이’ 문태서 장군 부활을 꿈꾸며>를 30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문태서 의병대장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고귀한 희생정신의 뜻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편집자 주>   1. 일본군이 기록한‘영각사전투’ 문태서가 의병활동을 전개했던 시기는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나 대체적으로 군대해산으로 촉발된 ‘정미의병’활동시기와 일치한다고 대부분의 연구물들이나 기록들이 밝히고 있다.1) 2) 그러나 지역에서 오랫동안 문태서를 연구하고 있는 김성진은 활동시기를 ‘을미의병’ 활동시기까지 올려 잡고 있다. 1907년 7월 일본에 의해 강제로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된 이후 해산군인들은 전국 각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의병부대에 합류하거나 독자적으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일본과 전투를 전개해 나갔다. 일본은 이 시기에 경찰조직, 헌병조직, 군대조직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탄압했으며, 이를 여러 가지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경찰조직과 헌병조직에서 남긴 자료는 ‘폭도에 관한 편책’3)이며, ‘한국주차군’이라는 이름으로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군인들이 남긴 자료는 ‘폭도 봉기의 건’과 ‘한국주차군 전투상보’이다. 한국독립운동사 중 의병과 관련된 자료는 대부분 이 세 가지 자료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각 종 관련 연구물들도 이 자료를 활용하고 있다. 1908년 1월 21일 공식문건인 ‘폭도에 관한 편책’에 처음 등장한 문태서4)는 3월12일에서 13일 사이에 벌어진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영각사(당시 안의군 서상면) 부근에서 벌어진 일본 군경과의 전투로 화려하게 의병전쟁의 막을 올렸다.5) 많은 기록들이나 연구물들이 문태서가 1908년 이전부터 의병전쟁을 시작했다고 적고 있으나,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하지 않고 있으며, 다만 구전이나 명확하지 않은 기록물이나 출판물에 의존하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공식 문서와 의병전투에서 지휘자가 문태서(이명10종 포함)임을 밝히고 있는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서 사실을 확인하고 해석하고자 하였다. 기록상으로 문태서가 일본과 벌인 최초의 전투는 ‘영각사 전투’6)이며, ‘폭도에 관한 편책’에는 일반적인 의병항쟁과는 다르게 이날 전투상황이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당시 거창과 함양 등 서부경남의 경찰조직을 관장하고 있던 거창경찰분파소 소장이 작성한 보고서에도 6면에 걸쳐 전투상황이 기록되어 있다.7) 기록을 살펴보면 ‘영각사 전투’를 시작으로 덕유산을 둘러싸고 있는 무주, 장수, 거창 등지에서도 지역전투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8) 9) 연구자는 ‘영각사 전투’의 사실성을 밝히기 위해 첫째,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문태서’로 검색하면 누구나 찾을 수 있는 보병제12여단사령부발 제84호(步兵第一二旅團司令部守發 第八四號)에 기록된 내용을 우선 인용하고, 둘째, ‘영각사 전투’를 증명해 주는 경찰측 자료로 거창경찰분서장 보고서인 ‘원본 사진’을 덧붙이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영각사전투’에 대한 해석과 전투의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발신자 : 남부수비관구사령관 쓰네요시 다다미치(南部守備管區司令官 恒吉忠道)수신자 : 경무국장 마츠이 시게루(警務局長 松井茂)三月 十四日 咸陽守備步一四 第五中隊 川原隊 新基(安義 西北方 六里)附近의 戰鬪詳報3월 14일 함양수비 보14 제5중대 카와하라 대원 신기(안의 서북방 6리)부근의 전투상보一. 賊魁 文泰瑞의 引率하는 賊徒 約 五十名이 新坪(安義 西方 約 三里)에 侵入하였다는 急報에 接하고 川原特務曹長 以下 七名은 三月 十三日 午後三時 咸陽出發 午後七時半 大篁岺(安義 西方 二里)에 到着하여 左의 情報를 得하였다. 約 五十名의 賊은 三月 十二日 同村에 侵入하여 金品을 强奪한 後 本日 새벽前 于田村(安義 西北 三里)을 向하여 去하였다.(적괴 문태서가 인솔하는 적도 약 오십명이 신평(안의 서방 약 3리)에 침입하였다는 급보를 접하고 카와하라 특무조장 이하 7명은 3월 13일 오후 3시 함양을 출발하여 오후 7시 30분에 대황령(안의 서방 2리)에 도착하여 다음과 같은 정보를 얻었다. 약 오십명의 적은 3월 12일 마을에 침입하여 금품을 강탈한 수 오늘 새벽 우전마을(안의 서북 3리)로 향했다) 二. 十三日 午後十時 大篁岺 出發 夜行軍을 하여 于田에 至하여 該 賊이 居起(安義 西北方 約 三里半)로 向한 것을 알고 急行 翌十四日 午前六時 該 地에 至하여 左의 情報를 得하였다. 首魁 文泰瑞는 此 附近에 徘徊하고 있었던 他賊團을 統一하여 百餘名이 되어 十三日夜半 六十岺(安義 西北 五里) 方向으로 去하였다 한다. 따라서 午前七時 居起를 發하여 午後一時 新基에 到着하였다. 當時 新基 北方 約 二千미터 靈覺寺 北方高地上에 二三賊徒의 展望哨같은 것을 보고 또 靈覺寺에 數名의 賊徒가 있음을 發見하였다. 따라서 直時 該 寺를 向하여 行進하여 該 寺 東方 三百미터의 高地에 達하였으나 松林으로 因하여 展望을 不許하였다.(13일 오후 10시 대황령을 출발 야간행군을 하여 우전에 도착하니 그들이 거기(안의 서북방 약 3.5리)로 향한 것을 알고 급속 행군하여 다음날 14일 오전 6시에 그곳에 도착하여 다음과 같은 정보를 얻었다. 수괴 문태서는 그 부근을 배회하고 있던 다른 집단을 통합하여 백여명이 되어 13일 밤에 육십령(안의 서북 5리) 방향으로 갔다고 하였다. 따라서 오전 7시 거기를 출발하여 오후 1시 신기에 도착하였다. 당시 신기 북방 약 2000미터 영각사 북방 고지상에 2~3명이 있는 전망 초소 같은 것을 보았고, 또 영각사에 수명의 적도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따라서 즉시 그 절을 향하여 행진하여 절 동방 300미터의 고지에 도착하였으나 소나무숲으로 인하여 앞을 볼 수 없었다.) 三. 午後二時二十分 該 寺 東方 約 千미터의 高地上으로부터 數發의 射擊을 受하였다. 同時에 該 寺 西方 約 千五百미터 高地上에도 約 五十名의 賊徒가 現出하였다. 暫時 後 다시 約 四十名의 賊徒는 該 寺 南方 約 六百미터의 谷地로부터 喊聲을 擧하고 突擊하여 왔으나 數分後 이를 擊退 潰走시켰다. 그러나 아직 二 方向의 賊은 地의 利에 依하여 頑强히 抵抗하였다. 따라서 于先 東方의 賊을 擊退하고 이어 西方高地의 賊을 向하여 攻擊前進하였다. 賊은 我 運動이 秘密하여 退却한 것으로 誤解하고 다시 該 寺에 集合하고자 하였으므로 猛烈히 攻擊하여 北方으로 潰走시켰다. 追擊 約 二時間에 及하였으나 夜暗과 森林으로 因하여 드디어 踪跡을 失하였다. 賊의 死傷 未詳이나 遺棄한 屍體 五 賊魁는 文泰瑞로 그 數 約 百十名이다.(오후 2시 20분 절 동방 약 1000미터 고지상으로부터 여러 발의 사격을 받았다. 동시에 절 서방 1500미터 고지상에도 약 50명의 적도가 나타났다. 참시 후 다시 약 40명의 적도는 절 남방 약 600미터의 계곡으로부터 함성을 지르며 돌격하여 왔으나 수분 후 이를 격퇴시켰다. 그러나 아직 두 방향의 적은 지형을 이용하여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따라서 우선 동방의 적을 격퇴하고 이어 서방고지의 적을 향하여 공격 전진하였다. 적은 우리가 비밀리에 움직임을 눈치 채지 못하고 퇴각한 것으로 판단하여 다시 절에 집합하고자 하였으므로 맹렬히 공격하여 북방으로 도주시켰다. 추격을 약 2시간 동안 하였으나 밤으로 인한 어두움과 소나무숲으로 인하여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적의 사상은 알 수 없었으나 버리고 간 시체가 5구, 적 대장은 문태서로 그 수 약 백여명이다.)   1) 이용철, 「의병장 문태수의 생애와 항일투쟁」, 「군사사연구총서」10,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22.2)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문태수』, 1963.3) 대한제국 말기에 우리나라 경찰권을 장악한 일본은 이름만 남은 대한제국 경찰을 실질적으로 통제하고 있었으며, 이에 저항하는 의병들을 폭도라고 불렀고 의병들을 토벌한 상황은 각 지방의 경찰 서장이나 일본인 헌병대장, 그리고 각 도의 관찰사(현, 도지사)가 서울에 있는 일본인 경무국장(당시 경찰 총 책임자)한테 보고되었으며, 이러한 보고서를 모아 ‘폭도에 관한 편책’으로 만들었다. 일본은 1907년 대한제국 군대해산 이후 시작되어 1910년 사이에 벌어진 강력한 의병전쟁을 진압하기 위해 토벌작전을 벌였으며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4)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9 의병편Ⅱ (一) 一月, 全羅道. 錦警發 第四○號5)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9 : 의병편Ⅱ (三) 三月, 全羅道, 步兵第一二旅團司令部守發 第八四號6) 일본군경과 전투를 벌인 장소가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영각사 주변이었으므로 이 전투를 ‘영각사 전투’라고 정의하여 연구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7) 공훈사료관, 원문사료실, 폭도에 관한 편책 융희 2년 3월 (경남북. 전남북. 충남북도) 1 00198)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 자료9 의병편Ⅱ (三) 三月, 慶尙道, 『步兵第一二旅團司令部守發 第八三號』9)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 자료10 의병편Ⅲ (一) 三月, 慶尙道. 『步兵 第十二旅團司令部 守 發 第八九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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