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6.25전쟁이라는 대참사를 겪은 대한민국은 아마도 전 세계에서 가장 불쌍하고 비참한 나라 중 하나였을 겁니다. 경제적 피폐 속에 정리되지 않은 식민시대의 유산과 분단으로 인한 민족 내부의 갈등과 분열을 견뎌내며 누군가의 노력과 희생으로 경제성장의 기반을 닦고 한숨을 돌릴 때쯤 국제사회는 한국의 경제성장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한민족은 매우 우수한 민족임이 분명하고 같은 독재를 해도 한국 사람이 하면 달랐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분분하지만, 그 시절 한국과 비슷한 처지의 나라 중에 권위주의적 통치를 겪지 않은 나라는 하나도 없습니다. 조국 근대화라는 기치를 세우고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제철, 조선 같은 산업을 진심으로 고민한 독재자는 아마도 박정희 대통령이 유일하지 않을까요? “세계적”이라는 게 꿈만 같던 시절 “한강의 기적”이라는 세계가 주목한 드라마의 주인공인 박정희는 우리나라 최초의 “월드 스타”입니다.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은 정치, 경제, 문화 어떤 분야에서도 세계의 변방에 불과했지만, 조국 근대화의 역군인 기성세대는 자녀교육에 모든 것을 투자하며 새천년을 준비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마침내 밀레니엄 시대가 시작되면서 문화예술 분야에서 경제성장과 교육투자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고작 홍수환의 4전 5기 신화나, 전설의 육상선수라는 임춘애의 라면 이야기에 열광하던 일은 아득한 옛날이야기가 되었고 언제부터인가 레슬링이나 복싱이 아닌 “우아한”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이 예사로운 일이 되고 문화, 예술 분야에서도 세계 최고가 되는 일이 흔해졌습니다. 방탄소년단의 등장에 전 세계 젊은이들이 열광하고 기생충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더니 이제는 K-팝, K-컬쳐가 세계를 정복한다는 말이 회자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그동안 쌓아온 우리나라의 문화적 성취에 화룡점정을 찍는 쾌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굴곡진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어떤 이들에게는 진영을 가르는 리트머스시험지가 되어버린 제주 4.3사건과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작품인지라 시비가 있을까 염려한 것은 24년 전 김대중 대통령이 수상했던 노벨평화상이 아직도 전 국민의 동의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안타까움”과 “편견” 때문입니다. “뜻”있는 여류작가 하나가 역사를 왜곡했다고 비판하며 문학의 탈을 쓴 색깔론의 깃발을 들었지만 주목받지 못하고 편 가르기를 업으로 하는 이들조차 동조하지 못하는 것은 한강의 성취가 워낙 압도적이고 그 울림이 크고 깊이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전 세계의 독자들이 한강에 주목하고 한국문학이 조명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며 느끼는 뿌듯함은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벅찬 감동입니다. 1901년 시작된 노벨상의 역사에서 1957년 수상한 알베르 카뮈 이후에 가장 젊은 수상자이고 세계인구의 60%인 45억 명이 사는 아시아에서 한강이 최초의 여성 수상자랍니다.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어떤 이야기가 세계인들을 설득했는지 한강에 빠져 보시기를 권합니다. 깊어가는 가을, 독서의 계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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