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은 군대해산 이후 덕유산을 근거지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대항하여 대활약을 펼치다 순국한 의병대장 문태서 장군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용맹한 기상을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문태서 의병장 추모사당에서 추모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 주간함양은 전진석 3·1운동 함양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의 <‘덕유산 호랑이’ 문태서 장군 부활을 꿈꾸며>를 30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문태서 의병대장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고귀한 희생정신의 뜻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편집자 주>   ‘13도 창의군 서울진공작전’은 대한제국 말기,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던 1907년을 전후로 일어났던 의병들이 일본군을 상대로 벌였던 대규모 의병전쟁이다. 이 작전은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의병부대를 연합하여 서울을 탈환하고자 시도했던 무장투쟁으로서, 한국 주재 각 국 대사관에 대일전쟁 선포를 알리고 시작한 역사적 사건이다.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강제한 이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국내 치안권을 확보하였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는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1907년 고종 황제가 강제로 쫓겨나고,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전국에서 의병이 조직되어 일본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해산된 군인들 중 상당수가 의병 및 의병지도자로 참가하여 항일 투쟁을 벌여나갔다. 지역적으로, 그리고 산발적으로 전개되던 의병활동을 전국규모로 통합할 필요성을 느낀 지도자들이 모여 ‘13도 창의군’을 조직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조직으로 ‘서울진공작전’을 벌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13도 창의군’은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허위, 이강년, 문태서, 신돌석 등 당대의 주요 의병장과 부대들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1907년 12월, 경기도 양주(현 구리시 부근)에서 대규모 회의를 열고, 서울을 점령하여 일제의 지배를 종식시키고자 하는 계획을 세웠다. 13도 창의군의 목표는 일제의 식민 통치를 부정하고, 서울을 탈환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자주 독립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서울을 점령한 후, 대한제국의 법통을 계승하여 일제에 맞서 싸우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전국 각지로부터 경기도 양주에 집결한 의병의 규모는 총 48진에 1만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그 가운데 중요한 부대와 인원수를 보면 선생이 거느린 경기도 의병 2천명을 비롯하여 강원도의 민긍호 의병부대 2천명, 이인영 의병부대 1천명을 비롯해서 약 6천명이었고, 충청도의 이강년 의병부대가 5백명, 황해도의 권중희 의병부대가 5백명, 평안도의 방인관 의병부대가 80명, 함경도의 정봉준 의병부대가 80명, 전라도의 문태서 의병부대가 약 1백명 등이었다. 양주에 집결한 의병장들은 12월에 회의를 열어 13도창의대진소를 성립시키고,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한 뒤 구체적으로 서울 진공작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때 선공을 맡았던 선생은 각 부대별로 서울 동대문 밖에 집결토록 조치한 뒤, 3백명의 선발대를 거느리고 1908년 1월 말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깊숙이 진공하였다.’ ‘13도 창의군’이 서울로 진격하는 작전은 실패하게 된다. ‘대규모의 의병이 결집하여 서울로 진격하려 한다’는 정보는 비밀일 수 없었으며, 이를 파악한 일본군은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하였기 때문이다. 후방부대의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선봉부대 의병들은 여러 차례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나, 무장과 병력에서 열세였기 때문에 점차 고립되어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13도 창의군’은 전국에서 모인 의병 연합체였기 때문에 일사불란한 지휘체계를 확립하지 못했다. 그래서 통일된 전략을 수립하는데 애로를 겪을 수 밖에 없었으며, 각 의병부대들이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두고 볼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총대장 이인영 조차도 부친상을 이유로 독단적으로 고향으로 내려가고 만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이 작전은 실패하게 되고 모여들었던 의병들은 패배감을 안고 각 지역으로 돌아가게 된다. ‘13도 창의군 서울진공작전’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우리가 주목할 수 밖에 없는 까닭은 ‘호남의병대장’라는 직함을 가지고 참여한 문태서가 어떠한 역할을 수행했는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13도 창의군 서울진공작전’에 관한 기록은 너무나도 빈약하여 역사적 가치를 부여할 만한 것이 거의 없다. 기껏 ‘13도 창의대장 이인영 심문조서’정도이다. 이 기록만 가지고는 ‘호남의병대장 문태서’의 역할을 찾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이 작전에 실제로 참여했는지 조차도 의심스럽다. 그래서 연구자는 문태서의 구체적인 활동 내용을 찾아내기보다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서울로 올라가 전투에 참여했는지에 연구의 초점을 맞추고자 하였다. 문태서의 의병활동을 기록한 역사자료나 연구물 중에서 ‘13도 창의군 호남의병대장 문태서’에 관한 내용을 분석해 보았다. 그 결과 문태서가 의병부대를 이끌고 서울로 올라갔다, 아예 서울로 올라가지 않았다고 하는 기록과 연구물 등이 혼재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와 관련한 자료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호남의병대장 문태서’가 ‘13도 창의군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13도 창의군 총대장’이인영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작성한 심문조서이다. 이인영은 일본 경찰의 심문을 받으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1)(중략) 문 : 그때 인솔하고 온 각 도의 지휘자는 누구누구인가? 답 : 전라도는 문태수(文泰洙), 본명은 문태현(文泰鉉)이라 하며, 충청도는(이하 생략)문 : 문태수(文泰洙)는 어떤가? 답 : 이름은 들었습니다만 만난 적은 없습니다. 문 : 유생인가? 답 : 학문은 있지만 유생은 아닙니다. 문 : 학문이 있고 유생이 아닌 것은 어떤 점에 구별이 있는가? 답 : 진짜 유생은 공맹(孔孟)의 가르침을 받고 이를 지키려는 자를 말합니다.위 입장을 가진 연구자들은 ‘13도 창의군 총대장’ 이인영이 문태서를 만난 적이 없다고 진술하고 있는 까닭이 ‘호남의병대장’ 문태서가 결코 서울로 올라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군사연구총서 10집 166쪽 이용철은 ‘의병장 문태수의 생애와 항일투쟁활동’에서 참여하지 않은 근거로 한진수 판결문에 나타난 군자금 모금활동시기와 겹친 점, 이인영이 문태서를 보지 못해다는 점, 대한매일신보 창의군 편제 기사2)를 들고 있다.3) 그렇게 해석하는 것도 타당하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에 반론을 제기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문태서를 최초로 연구한 김성진은 “이인영이 문태서를 본 적이 없다고 한 까닭은 문태서가 유생이 아니라고 스스로 밝혔기 때문이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문태서를 의병지도자로 인정했을 경우 양반 유생들의 반발이 있을 것을 염려해서였다고 덧붙이고 있다.4) 그러나 많은 역사기록들과 연구자들은 문태서가 의병 100여명을 이끌고 양주에 합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대였던 대한광복군 소사에는 ‘서울진공작전에 문태서가 이끄는 의병 100명이 호응하여 참가하였다’고 하였으며5) 김성진도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다.6)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인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작성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인 조소앙도 자신의 문집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기록하고 있다.7) 국가보훈부도 2004년 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허위’ 공적 상세에서 같은 내용을 밝히고 있다.8) 독자들은 문태서의 참전 여부를 나름대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 부분임으로 본 연구에서는 결론을 유보할 수 밖에 없다. 2024년 10월 2일 민주당 국방위원회 간사인 부승찬 의원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에 따라 한국광복군 및 수많은 독립군의 역사가 우리 국군의 역사라는 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 국군조직법 제1조를 개정하는 「국군조직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 하였다. 대한민국 국군의 시작을 임시정부 대한광복군으로 잡는 그 날이 오면 함양군의 자랑인 문태서는 대한민국 국군 탄생의 선구자로 새롭게 우리들에게 다가올 것이다.   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統監府文書 8권 一. 憲機第一三四五號 李麟榮 審問調書2) 대한매일신문, 『의병총대장 이인영씨의 사적』, 신문아카이브, 대한매일신문 1909년 7월 28일 1면3) 이철용, 『의병장 문태수의 생애와 항일투쟁』,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22, p1744) 김성진, 『항일의병대장 문태서 연구』, 함양문화원, 2019. p 228 5)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한국광복군 Ⅱ 韓國光復軍小史6) 김성진, 『항일의병대장 문태서 연구』, 함양문화원, 2019. p 228 7) 조소앙, 유방집 『독립운동가 82인-이인영편』, 한국고전번역원,20198) 보훈처, 『2004년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왕산 허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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