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은 군대해산 이후 덕유산을 근거지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대항하여 대활약을 펼치다 순국한 의병대장 문태서 장군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용맹한 기상을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문태서 의병장 추모사당에서 추모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 주간함양은 전진석 3·1운동 함양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의 <‘덕유산 호랑이’ 문태서 장군 부활을 꿈꾸며>를 30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문태서 의병대장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고귀한 희생정신의 뜻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편집자 주>   문태서의 의병활동을 연구하기 시작한 이후로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질문 하나가 있었다. 최익현을 비롯한 유생 의병장들이 을사의병전쟁을 이끌었고, 해산군인이 중심이 되어 정미의병전쟁을 이끌었는데 문태서는 출신성분도 불분명하다.1),2),3) 그리고 문태서는 이인영이 ‘13도 의병 서울진공대작전’을4) 위해 1907년 11월에 양주에서 13도 창의대진소(13道 倡義大陣所)를 구성하기 이전까지 의병활동 기록이 거의 없었다.5) 그런데 어떻게 호남지역 의병을 대표하여 ‘13도 의병 서울진격작전’에 참가할 수 있었으며, 호남지역 의병을 대표하는 자리인 ‘전라창의대장(全羅倡義大將)’이라는 어마어마한 직함을 맡을 수 있었는지 내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13도 의병 서울진공대작전’은 양반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왕권복원을 위해 벌인 의병투쟁이었는데, 경남 안의군 서상면에서 태어나 가족과 함께 살고 있던 이름없는 인물이 호남을 대표하는 유생 의병장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다시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다. 지난 3년 동안 ‘문태서’에 관한 새로운 자료들이 많이 올라와 그 자료의 끄트머리를 잡고 거슬러 올라갔다. 끄트머리 잡고 따라가면서 다양한 관련 자료를 찾아갔고 지난 역사를 추적하고 나름대로 해석해 보았다.    그리고 호남지역에서 김동신, 기우만 그리고 고광순이 함께 의병의 기치를 높이 들었고, 김동신은 전투력 강화를 위해 해산군인 출신 민긍호6)를 찾아 강원도로 향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해산군인 전투부대를 지원받았으며 전남북과 경남북 그리고 충남북이 인접해 있는 덕유산과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산악지역을 활동근거지로 선택했음을 확인했다. 이 후 김동신 의병부대는 진해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포병부대까지 토벌에 동원될 정도로 강력한 의병부대로 성장하여 지리산-덕유산으로 이어지는 남부 산악지대 의병부대를 통솔하게 되었다. 1. 호남의병의 기치를 든 김동신이 기우만, 고광순과 함께 문태서가 등장할 무대를 만들다! 을사조약 이후 벌어진 유생들이 중심으로 하는 의병활동이 점차 약해져 갈 무렵, 일본은 우리나라를 송두리째 집어삼키기 위해 숨통을 조이기 시작했다. 군대를 신식화해서 국권을 유지하고자 했던 고종의 노력을 무참하게 짓밟아버린 사건이 1907년 7월 군대해산이다. 대한제국의 마지막을 지키고자 했던 군인들은 문서 한 장으로 해산될 수 밖에 없었으며,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많은 군인들은 일본과의 전쟁에 앞장서게 된다. 군대해산을 거부하거나 강제해산 당했던 대한제국군은 전국 각지에서 나름대로의 의병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유생 중심의 의병부대는 해산군인이나 평민을 중심으로 하는 의병부대로 바뀌기 시작했으며 전투력 또한 강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호남지방에서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의병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지 않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황헌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全羅南北道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6월 이후에는 관동과 영남 지방에서만 의병이 치성하고 오직 호남 지방에서는 의병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호남을 위해 부끄럽게 생각하였는데, 이때 李錫庸은 任實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金泰元은 咸平, 奇三衍은 長城, 文泰洙는 茂州, 高光洵은 同福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시 소란하였다.’7) 전국 각지에서 군대해산을 기점으로 의병전쟁이 거세게 불타오르자 호남지역에도 의병의 기치를 높이 들고자 하는 인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을사의병전쟁 경험이 있던 김동신은 고광순, 기우만과 함께 내장산에서 모여서 호남지역에서 의병의 모아 일본군경과 싸우기로 결의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김동신이 체포된 후 1908년 6월 대전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으면서 밝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략) 문 : 너는 지난 번 조사를 받으면서 기우만(기삼연 이명), 고광순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함께 싸우기로 약속하였다고 하였다. 지금 그 두 명은 어디에 있는가?답 : 나는 당시 전라북도 정읍군 내장산에서 병력을 모집하고 있었으며, 기우만은 전라남도 장성군에서, 고광순은 전라남도 곡성에서 병력을 일으켰다. 이후 각각 활동을 전개하였다. 고광순은 작년에 전라북도 지리산에서 일본헌병대와 전투를 하다가 전사하였으며, 기우만은 지금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으나 순창부근에서 활동 중이며, 작년 8월 경에 들은 바로는 2백명 가량 된다고 하였다.8) (이하 생략) 金東臣(1871∼1933)은 충남 회덕군 출신으로 1906년 3월 15일 홍주에서 기병한 閔宗植 휘하에 들어가 선봉장이 되었다.9) 그는 민종식에게 전라남북도에서 기병할 것을 약속한 후, 약 30명의 의병을 이끌고 전북 무주군 덕유산 자원암(紫原庵)으로 들어가 유진하면서 거사 준비를 서둘렀다. 이 때 민종식이 먼저 홍주에서 기병하였지만 그 후 행방을 알 수가 없었으므로 김동신은 전라북도를 잠행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해 나갔다. 한국군 해산 후, 의병전쟁이 크게 확대되어 가자 그는 전북 정읍군 내장산 白羊寺에서 奇宇萬·高光洵과 더불어 기병할 것을 의논하고 인근 부락으로 통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군기를 모았다.10),11) 하지만 그가 모은 의병들은 주변 농민이거나 기껏 산에서 사냥이나 하는 산포수가 대부분이어서 일본군경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기에는 너무나도 무모한 짓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을 김동신은 그의 문집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12) ‘기껏해야 8~9명 밖에 되지 않는 일본군인들이 지리산 기슭에 있는 마전리에서 우리 부대를 빠르게 쫓아왔다. 우리 부대와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으며, 순식간에 적에게 꼬리를 잡히고 말았다. 그 순간 수백명에 달하는 의병들은 싸울 태세를 갖추기는 고사하고 일제히 도망치기 시작했으며, 의병부대의 후군장인 임병주는 벌써 도망가고 없었고, 선봉장인 국인묵(鞠仁黙)13) 조차도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명령을 내려 말하기를(중략)’ 망해가는 조국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겠다고 다짐하여 일어선 의병들이었지만 현실은 너무나도 가혹했다. 신식총으로 무장한 일본군경들은 이미 일본 국내에서 오랫동안 소총으로 전투를 벌여온 정예병이었다.14) 무기라고는 죽창이나 화승총, 그리고 기껏해야 산포수들이 사용하던 사냥총이 전부였던 의병부대에게 일본군경을 상대할 전투력을 기대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자각한 김동신은 의병부대의 전투력을 강화시킬 방법을 모색하였으며, 그에 대한 해답을 강원도에서 일본군경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던 해산군인 특무정교 출신 민긍호 의병부대에서 찾았다. 김동신은 1907년 9월 중순경에(17일?) 의병부대의 제반 사무를 유종환을 비롯한 선봉장들에게 맡기고 혼자서 민긍호 의병부대를 찾아가게 된다.   1) 統監府文書 8권 一. 李麟榮陳述調書 憲機第一三四五號 李麟榮 審問調書 ‘유생이 아니라고 대답하고 있다.’2) 성대경 전게 논문, 김의환 전게 논문, 박성수(朴成壽) ‘1907~10년간의 의병전쟁에 대하여’ ≪한국사연구≫ 1 1968년, ≪폭도에 관한 편책≫ 경무국 편, ≪폭도수령조서(暴徒首領調書)≫ 한국주차헌병대 본부 1909년 1월, ≪저명한 한국폭도의 수령조서≫ 한국주차군사령부 1908년 7월 15일 보고, ≪한국독립운동사≫ 애국동지회 편, ≪폭도사편집자료≫ 경상북도 감찰사 보고, ≪산남의진사(山南義陣史)≫ 상·하권, ≪폭도사편집자료≫ 경무국, ≪산남의진유사(山南義陣遺史)≫ 1970년 간 / 위 참고자료에서는 문태서는 해산 군인 출신 의병장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3)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統監府文書 6권 一. 憲兵隊機密報告(156) [暴徒 首領에 대한 조서 보고 件] 에서는 문대서(문태서의 이명)는 유생의 아들이라고 적고 있다. 4) 13도 의병이 모여 서울을 탈환하고자 하는 이 사건에 대한 공식 명칭이 아직까지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여기서는 ‘13도 의병 서울진공대작전’으로 사용한다. 5)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 연표 1910년대6) 군대해산 당시 원주진위대 특무정교로 해산에 반발하여 휘하 군인들을 무장시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이후 강원도에서 의병전쟁을 지속하였다.7) 황현 매천야록 隆熙 元年 丁未(續)(1907년), 26. 호남지방의 의병 봉기8)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자료 의병편Ⅳ (二) 六月, 忠淸道, 大警發 秘 第三七號 김동신 심문조서 9) 홍영기, 『구한말 김동신 의병에 대한 일고찰』, 한국학보56, 일지사, 1989. p111 홍영기는 김동신이 민종식 휘하에서 선봉장에 임명된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10)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신편 한국사 국권회복운동 Ⅳ. 항일의병전쟁 3. 정미의병 2) 중부지역의 의병전황 (3) 의병장들의 의병활동 나. 호남의병-전북. 1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자료 의병편Ⅳ (二) 六月, 忠淸道 2. 大警發 秘 第三七號12) 김동신, 『김동신문집』, 1906.06 ~ 1912.12 일기체, p17~19. ‘日兵八九名 自山外麻田里 方今逐來 其時我中軍 無尺寸之兵 不意賊到 將爲奈何 從者數百人皆奔徒(중략) 而觀動靜 即後軍將林秉柱施已逃命 鞠仁黙又欲避身 余下令曰 軍中聞將軍令不聞天子詔 而所謂頭領者不告主將 任意去留 是何法意’13) 국인묵(鞠仁黙) : 김동신 의병부대의 선봉장으로서 주요 전투에서 맹활약하였다. 14) 일본에서는 1860년대에 에도막부와 지역 군벌인 조슈번과 샤쓰마번 연합세력 간에 주도권 쟁탈을 위해 치열한 내전을 오랫동안 벌였다. 이때 서양의 신식총이 다량으로 유입되었으며, 총기제작기술이 급속도록 발전하였다. 그리고 총격전 전술도 개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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