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은 군대해산 이후 덕유산을 근거지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대항하여 대활약을 펼치다 순국한 의병대장 문태서 장군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용맹한 기상을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문태서 의병장 추모사당에서 추모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 주간함양은 전진석 3·1운동 함양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의 <‘덕유산 호랑이’ 문태서 장군 부활을 꿈꾸며>를 30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문태서 의병대장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고귀한 희생정신의 뜻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편집자 주>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은 이토오히로부미 암살에 성공하고 당당하게 체포당한 하루 후인 10월 27, 문태서는 자신이 지휘하고 있던 의병부대를 부대근거지와 가까운 경부선 철도가 지나는 이원역 부근으로 이동시킨다. 이원역은 문태서 의병부대의 근거지인 덕유산에서 가장 가까운 경부선 역이다. 이원역을 향해 이동하면서 의병의 세력권 내에 있던 지역인 영동군 양남면 반포동(현 영동군 학산면 마을불명) 지역에 들러 친일세력으로부터 의병활동 자금을 강요하였다. 의병들은 해당지역 거주자 성참봉의 둘째 아들을 인질로 잡아 데리고 가면서 의병군자금을 마련해 놓으라고 통고하였다.1) 28일 군자금을 확보한 의병들은 29일 다시 이동한다. 문태서 의병부대가 오후 7시경 이동하면서 목적지로 잡은 곳은 옥천군 이원면 소재 경부선 이원역이었다. 문태서 의병부대는 왜 하필이면 10월 29일 밤 경부선 기차가 지나가는 이원역 주변에 매복하여 포위하였을까? 이 의문점을 풀기 위해서는 이토오히로부미의 이동 동선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10월 16일, 일본 시모노세키항에서 배를 타고 출발한 이토오히로부미는 10월 18일 중국 대련항에서 내렸다. 대련항에 내려 만주침략을 위한 각 종 업무를 처리한 이토오히로부미는 10월 22일 봉천, 25일 장춘을 거쳐 26일 하얼빈역에 내렸다.2) 그는 러시아 재무대신 코콥체프를 만나 조선합병에 대한 러시아의 동조를 구하고자 했다. 임무를 마친 이토오히로부미는 열차를 타고 28일 통천, 29일 서울을 거쳐 부산으로 갈 예정이었을 것이다. 만약 이 예정된 노선으로 움직인다면 충북 옥천군 이원역을 지날 수 밖에 없다. 만약 문태서가 이토오히로부미가 탄 열차를 알고 있었다면 이원역에서 서로 만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문태서 의병부대가 덕유산 근거지를 떠나 이원역 부근으로 이동하고 있었던 까닭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1월 3일 문태서는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급행열차를 탔으며, 대전역에서 내려 다시 보통열차에 숨어 올라 옥천역에서 하차한 사실로 미루어3) 문태서는 이토오히로부미에 관한 정보를 가장 빠르게 알 수 있는 서울에서 작전을 지시하고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덕유산을 근거로 의병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던 문태서는 서울과 동경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상세하게 알고 의병부대를 움직였을까? 아니면 우연히 문태서 의병부대가 이원역 부근을 지나고 있었을까? 다수의 기록과 신문들을 살펴보면 문태서가 덕유산에 근거지를 두고 의병부대를 운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인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며, 심지어 국제 교류 흔적도 확인할 수 있다. 1) 수령 문태수는 경상북도 지례군 대덕산 속에 있었는데 목하 부하 38명을 이끌고 경남 안의군에 출몰하였고 또 그의 참모라고 일컫는 성 처사라는 자를 서울에 입경시켜 만사 탐문시키고 있다고 함.4) 2) 문태수는 지난달 하순 그 종적을 감추고 있어서 탐문하고 있었는데 근래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문태수는 경성에 올라간 듯하다. 아마 비밀리에 탄약을 매입하기 위한 듯 하다.5) 3) 재작년부터 우리 경찰서 관내에 나타나 활동하고 있는 의병대장 문태수는 작년 10월 이후 그 종적을 알 수가 없었는데 이번달 5일 오후에 유생복장을 하고 하인 1명을 대동하여 금산군 부동면 수통동에 들러서 경성에서 오는 바람에 경비가 부족함을 주민들에게 알리고 동민들에게서(중략)6) 4) 문태수는 소속 부하 전성범에게 부대를 맡기고 자신은 충청도 보은에 숨어 지내면서 보부상으로 변장하여 활동하고 있으며, 그 사실을 다른 의병들도 모른다고 하였다.7) 5) 오래 소식을 알지 못했던 의병대장 문태서는 새로이 병기를 획득하여 지난 달 말일 거창 월성부근에 나타나 전성범과...8) 6) ‘의병장 문태수씨가 상해에 계속 머무르면서(留連) 청국인과 동모한다고 모처에 전보(電報)가 래도(來到)하였다더라’9) 7) 폭도 수괴 문태서는 음력으로 지난달 22일(11월 3일) 경성에서 출발하는 급행열차로 대전역에서 내려 같은 날 보통열차에 숨어 타서 옥천역에서 하차하여 전라북도 금산군 기방리를 향한 흔적이 있음을 탐지하였다. 이 자는 문태수라고도 칭한다. 서울에서 숨어 지낼 때는 박명운이라고 사칭하였다 한다.10) 위의 기록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문태서는 서울을 자주 왕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울에 정보원을 두고 상황을 계속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토오히로부미의 만주 방문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며, 그의 동선에 대해서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던 문태서가 의병부대를 이원역으로 이동시킨 것은 분명한 의도가 있었다고 판단된다. 이러한 문태서의 의도는 이원역 습격 및 방화 이후 일본측이 취한 조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10년 11월 2일자 대한매일신보는 ‘대토벌 한다네 - 일본군 사령관 대구보는 이번 일본 대연습에 참여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가려하다가 이원정거장을 의병이 습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에 가기를 중지하고 크게 토벌하기를 시작한다는 말이 있다더라’라고 보도하고 있다.11) 이 기사 내용은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일본은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 약 2달간에 걸쳐서 대한제국 내 전라남도와 그 외곽지대에서 저항을 했던 항일의병들을 진압하기 위해 남한대토벌작전을 실시하고 그 결과 남한 의병들이 궤멸되었다고 공언하였다.12) 하지만 10월 26일 하얼빈에서 벌어진 이토오히로부미의 암살과 10월 29일 벌어진 이원역습격사건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하얼빈에서 벌어진 사살과 이원역 습격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두 사건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충격으로 인해 일본 본토에서 실시하려던 일본-한국 주둔군 종합훈련이 취소되었다. 뿐만 아니라 두 사건이 독립된 사건이 아니라고 본 일본은 다시 남한 대토벌을 실시한다. 이러한 사실과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태서가 의병부대를 이끌고 이원역으로 이동하였음을 우연으로 해석한다면 지나치게 편협한 해석이라 할 수 있다.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이 이토오히로부미를 사살한 역사적인 사건은 사흘 후인 10월 29일 충북 옥천 이원역 습격 및 소각 사건과 만난다. 일본 검찰의 취조를 받던 안중근은 검사의 심문을 통해 문태서와 만난다. 이토오히로부미는 안중근과 하얼빈역에서 만났다. 만약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원역에서 누구를 만나게 되었을까? 두 사건을 연결시키는 것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존재하는 기록과 벌어진 사건들을 연결시켜 가는 것도 의병대장 문태서를 알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6 : 의병편Ⅸ 補遺篇 28. 永秘發 第三七四號2) 김훈, 『하얼빈』, 문학동네, 2022, p4 ‘안중근과 이토오히로부미의 이동경로’3)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6 : 의병편Ⅸ (一) 一一月, 忠淸道 高秘收 第六七○九號의 一4) 統監府文書 10권 九. 憲兵隊機密文書 一 (128) 憲機第二九六號 [暴徒首領 兪宗完·文泰洙·全海鎭] 5)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6 의병편Ⅸ 補遺篇 全北警秘收 第四六六號6)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4 의병편Ⅶ (一) 四月, 全羅道 高秘收 第四四五號7)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4 의병편Ⅶ (二)五月, 慶尙道 慶秘收 第四八二號8)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4 의병편Ⅶ (二)五月, 全羅道 高秘 第五三九號9) 大韓每日申報. 1909.08.01. 2면 10)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6 : 의병편Ⅸ (一) 一一月, 忠淸道 高秘收 第六七○九號의 一11) 大韓每日申報. 1909.11.02. 2면 ‘대토벌 한다네’12)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統監府文書 9권 一○. 南韓大討伐實施計劃其他 (3) 南韓의 폭도 대토벌 실시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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