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잊혀진 직업이지만 필경사란 직업이 있었다. 지금처럼 복사기가 만들어지지 않았던 시절인 70~80년대 등사지에 잉크로 봉사를 해야 하고 그 등사지를 철필로 긁어 만들어 내는 것이 필경사였다. 컴퓨터가 보편화되고 복사기가 발명되면서 이런 필경사란 직업은 사라졌다. 이와 함께 지금은 없지만 차트사라는 직업도 있었다. 파워포인트가 없던 시절 고위층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는 어김없이 차트가 등장했다. 고위층들이 보기 편하게 큰 전지에 제목부터 시작해 차례대로 간략하고 깔끔하게 정리해 놓는 이들이 차트사였다. 지금은 잊혀 졌지만 함양군청에도 이 같은 일들을 무리 없이 해내던 이가 있다. 현재 마천면사무소에서 근무하는 송길명(61)씨. 그는 함양에서 몇 손가락에 들 정도로 글을 잘 쓰고. 한자를 많이 아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누구에게 배운 적은 없지만 손재주가 좋아 글을 쓰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어깨 너머로 배운 것이 전부다”라고 말했다. 1978년 26살의 젊은 청년이었던 그는 차트사로 일할 것을 제의받는다. 당시에는 정규직도 아니고 일반 잡급직이어서 많이 망설였다고. 송 담당은 “인쇄소를 하려는 꿈을 꾸었었다. 그러나 어린 나이로 사람들을 좀 알고 일을 시작 할까 해서 군청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런 것이 30년을 넘게 일하게 됐다”고 말했다. 필경사라는 지금은 생소한 직업이지만 당시만 해도 대기업이나 관공서에는 꼭 필요한 직업이었다. 그의 학력에 대해 물었지만 “형제가 많아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너무 알려고 하지 말라”고 정중하게 부탁하기도 했다. 어려서 농사짓는 것도 힘들고 조금의 용돈을 받을 수 있기에 시작한 것이 30년이 넘었다. 그는 함양군 내에서 가장 글을 잘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가장 많은 한자를 아는 이 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어깨 너머로 글을 배운 것이다. 계속 글을 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매일 서서 집중해서 작업을 하다 보니 그에게 없던 병도 생기기 시작했다. 온 신경을 집중하며 작업을 하다 보니 담배도 많이 피우게 됐다고. 그의 일과 중 가장 중요한 작업이 브리핑용 차트를 만드는 일이었다. 지금이야 파워포인트 등을 이용해 조금의 작업만 거치면 프레젠테이션이 가능하지만 당시만 해도 전지에 일일이 글을 써야만 차트가 완성됐다. 한밤중에 불려나가 일을 한 것도 부지기수. 그는 “중요한 손님. 즉 도지사나 장·차관이 방문한다는 말만 있으면 수일씩 밤을 새워 각 과의 브리핑 내용을 옮겨 적어야 했다. 많은 업무로 인해 시력도 나빠지고 몸도 버렸다”고 했다.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는 이 일에 전념했다. 그는 80년대 기능직으로 전환된 이후에도 업무는 변함이 없었다. 그의 능력에 대한 소문이 나면서 도청에서도 몇 번의 스카웃 제의가 오기도 했다. 그는 “내가 만약 인쇄소를 했다면 대박이 났을 것이다. 경쟁자가 없었으니 떼돈을 벌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군청 뿐 만 아니라 경찰서. 농협. 산림조합 등 유관기관의 일도 그의 몫이었다. 또한 연말이나 연초 각 기관에서 주는 표창장의 글도 대부분이 그가 쓴 것이라고. 그의 이 같은 재주는 타고 난 것도 있지만 끈임 없는 노력의 산물이다. 타고난 눈썰미와 소질. 거기에다 노력이 더해졌다. 그는 “노력도 많이 했다. 모르니 앞에 사람이 했던 것을 그대로 보고 할 수 밖에 없었다. 연습에 연습을 거쳐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금 그는 매일 매일 맡아왔던 잉크냄새가 그렇게 싫다고 한다. 수많은 업무로 인해 심신이 지쳐갈 때 그에게 활력소를 준 것은 국궁이었다. 그는 “활에만 온 정신을 집중하면 모든 어지럽던 일들이 정리가 되고 마음이 맑아 졌다”고 말했다. 그는 도민체전이 열리면 매번 함양군 대표로 출전한다. 지난 32회 대회를 시작으로 얼마 전 개최됐던 52회 대회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출전했다. 인사이동으로 마천면에 온지 6년 정도. 이곳에도 활터를 하나 만들었다. “마천 같은 유명한 관광지에 활터가 하나 있으면 좋겠다 싶어 주변 지인들과 함께 만들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최근 또 다른 취미를 가지게 됐다. 약 1년 전부터 시작한 기타 연주. 누구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라 인터넷 등을 통해 독학을 했다고 한다. 아직 수준급은 아니지만 은은한 기타 선율까지 들려줬다. 그는 또 붓글씨 쓰는 것을 여전히 즐긴다. 그의 스승은 책이다. 끊임없이 자기개발. 아니 즐길 거리를 찾고 있다. 그는 “내가 요즘 같은 시절에 태어났으면 ‘잡놈’이 됐을 것”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는 오는 6월 퇴임을 앞두고 있다. 어렵던 시절부터 시작해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업무환경을 겪었지만 여전히 앞으로 달려가고 있다. 퇴임 후 무엇을 할 것인지 물으니 “특별한 계획은 없다. 원래 돈을 버는 재주도 없었다. 활 쏘고 낚시 하고. 풍류를 즐길 계획이다”고 말했다. <강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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