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은 군대해산 이후 덕유산을 근거지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대항하여 대활약을 펼치다 순국한 의병대장 문태서 장군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용맹한 기상을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문태서 의병장 추모사당에서 추모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 주간함양은 전진석 3·1운동 함양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의 <‘덕유산 호랑이’ 문태서 장군 부활을 꿈꾸며>를 30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문태서 의병대장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고귀한 희생정신의 뜻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편집자 주>
경부선 이원역을 관할로 두고 있던 영동경찰서장은 ‘폭도내습의 목적은 주로 재화약탈에 있어서, 배일사상과 같은 목적은 전혀 없었으며 민간인 살상이 목적인 흔적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하얼빈 암살사건과 관련된 흔적은 전혀 없다‘고 단순하게 사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경과 중앙의 언론들은 결코 그렇게 보지 않았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동일한 시설에서, 동일한 목적으로 두 사건이 발생했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그들은 자연스럽게 이 두 사건을 연결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이 두 사건이 얽혀지면서 일본의 한국 국권 강탈은 더욱더 빠른 속도로 진행되게 되었다. 3. ‘경부선 이원역 습격 및 소각’을 보도한 당시 언론 기사들당시 언론사 중에서 유명한 신문은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였다. 황성신문은 우리나라를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고자 했던 일본군국주의 세력과 그들의 앞잡이인 대한제국 관료들과 일진회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으며, 대한매일신보는 대체로 우리나라 국민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다. 두 신문의 보도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의 상황을 보다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황성신문은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보도하고 있다.1)
황성신문 1909.10.31. 경부선 이원정거장 습격제1보(30일 오전 열시 20분발) 이원폭요 지난 밤 열시 30분경에 폭도 약 수백명이 경부선 이원역 정거장을 습격하여 철도역 정거장을 소각하고 관사와 기타 건축물의 대부분을 파괴한 후 즉시 도주하였다. 이 급보를 접한 대전역과 이동역 정거장에서는 밤 12시 50분 발 열차로 수비대와 헌병대 약간 명을 해당 지역으로 급행하게 하였다. 이원역 역무원들과 선로보수원들은 서울로 올라오는 17열차를 기다려 그 열차에 타고 피난하였으나 해당 열차는 철로 파괴를 염려하여 심천역으로 방향을 바꾸어 운행하였는데 심천과 이원간에는 폐쇄기와 전화가 파괴되었고 우체국 전신도 옥천관내는 오전 1시20분부터 불통이 되었다가 4시 10분이 되어서야 응급조치를 하여 개통이 되었으며, 17열차는 10열차의 뒤를 따라 운행을 하여 6시 40분에 대전에 도착하였는데 11열차는 전신과 전화가 모두 불통이 되었기 때문에 열차의 상황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제2보(11시 20분발) 경부선 이원역을 습격한 폭도의 수령은 문태서인데 일본군 토벌대와 수차례 충돌하였다. 지난 7~8월경부터 지리산과 연결되는 덕유산 부근에서 잠복하고 있다가 이번에 이토오 히로부미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과 조선 간의 긴밀한 왕복을 단절시키 위하여 근거지와 가까운 곳의 철도선로와 해당 지역 시설을 파괴하려고 하였는데 이는 반드시 서로 연락을 주고받는 곳이 있어야 가능한 듯하다.제3보(12시발) 이원역을 통과하는 열차는 일시 불통되었으나 오늘 아침이 되어서야 수비대의 경계 하에 철로를 응급보수하여 개통하게 되었고 소각된 정거장 장소에 임시 건물을 짓고 차표를 발매하며 기타 파괴된 곳을 신속히 수리하였으며, 일시 피난하였던 철도 역무원들은 십여 명의 수비병으로 호위하여 돌아왔다. 대한매일신보는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간략하게 보도하고 있다.2)
대한매일신보 1909.10.13. 의병 이원정거장 습격<이원의병> 제작일 밤 열시에 의병 백여 명이 경부철도 이원정거장을 습격하여 정거장과 부속 건물에 방화하고 전보와 전화와 기차가 한 시간 동안이나 연결되지 않았으며 그 정거장에 있는 일본인들은 모두 피난하였는데 이 의병들은 남한 여러 지역에서 일본군들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으며 덕유산 근처에서 머무르고 있다가 이번 이토오 히로부미 사건으로 인해 혼란함을 틈타 교통을 끊고자 함이라 하며 그 대장은 문태수라 하더라.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당시 언론들은 ‘경부선 이원역 습격 및 소각’을 매우 자세하게 보도하고 있으며, 특히 일본의 한국침탈에 앞장서고 있는 언론인 황성신문에서는 ‘대서특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3보에 걸쳐 자세하게 보도하였다. 두 언론사 모두 ‘문태서-안중근-이토오’를 자연스럽게 연결시키고 있으며, 이는 ‘덕유산 호랑이’1회 연재물인 ‘문태서를 아느냐?’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 왜 안중근을 심문하던 일본검사가 ‘문태서를 아느냐?’고 물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4. ‘남한대토벌작전’이 다시 펼쳐졌다!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10일까지 약 40일 동안 일본 제국은 소위 ‘남한 폭도(暴徒) 대토벌 작전’이라는 명칭으로 항일 의병이 가장 격렬한 지역인 전라남도 및 전북 일부 지역에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2,000여 명의 정규군을 동원하여 3단계에 걸친 작전으로 전라남도 지역에 항일 의병들을 진압했는데, 제1단계 작전은 9월 1일부터 15일까지, 전북 남원에 본부를 두고 고흥, 광주, 영광 등으로 이어지는 외곽 지대에서 진행되었다. 제2단계는 9월 16일부터 30일까지 영산포에 거점을 두고 고흥, 광주, 영광 근방을 기점으로 남서해안에 이르는 지대에서 진행되었다. 제3단계는 10월 1일부터 10일까지 목포에 거점을 두고 전라남도 서쪽 지방으로 탈출하는 항일 의병들을 섬멸하기 위해 무인도 지역까지를 대상으로 한 이른바 ‘초토화 작전’이었다. 일본 제국 군대는 압도적인 화력의 우세로 잔학한 방법을 동원하여, 양민과 민가에 방화하고 심지어 약탈 등을 일삼으면서 수많은 민간인, 양민들이 학살당했다. 일본은 ‘남한대토벌작전’을 통해 다음과 같은 효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하였다.3)(앞부분 생략)유형상의 효과는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그리고 또한 이보다 큰 것은 생각건대 무형 상 얻은 효과일 것이다. 이는 全羅南北道의 인민은 이미 진술한 바와 같이 우리 군대의 진가를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일본제국의 국력을 인식하고 있지 못했기에 왕왕 일본인에 대해서 倨傲不遜의 행위가 있었음은 衆目의 보는 바였는데, 이번 대토벌의 결과 이들의 惡風을 한 번에 씻어 낼 수 있었음은 실제의 상태로서 거류민 등이 가장 환희하고 군대의 공로를 稱揚하는 바이다.(뒷부분생략)10월 29일 자정에 펼쳐진 이원역습격 사건은 대한민국을 일본에 강제로 병합시키려는 절차를 진행하고 있던 일본에게는 대단한 충격이었다. 1차 남한대토벌작전을 통해 일본군경에 저항하는 세력들을 궤멸시켰다고 보고서를 작성한지 며칠도 지나지 않아 만주침략의 중요한 도구인 철도시설이 의병들에 무참히 파괴 및 소각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하얼빈역 이토오 히로부미 사살’과 ‘경부선 이원역 습격 및 소각’을 연결시켜보면 더욱더 놀랄만한 일이었다. 만주와 조선에서 벌어진 두 사건이 우연이 아니라 당연히 일어날 만한 연결된 사건이라고 일본군경은 판단했다. 만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합하여야만 하였으며, 이를 위해서는 나머지 의병들을 진압해야만 했다. 일본 한국주차군사령관 데구보는 또다시 토벌계획을 준비하기 위해 일본 본토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던 훈련 참석을 미루었다.4)5)이 사건은 일본군경이 가장 많은 보고서를 만들어낸 사건이며 단일 보고서 중 문서량이 가장 많은 사건 중 하나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군경은 덕유산 및 속리산 주변의 폭도토벌계획을 별도로 수립하게 된다.
‘사령관귀국중지’, 황성신문[皇城新聞], 19091102사령관 귀국중지 주한국군사령관 대구보대장은 일본육군추계대연습에 참관하기 위하여 어제 출발하기로 예정하고 일본 통감에게 고별까지 하고 여행준비를 마쳤는데 돌연히 이원역이 파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 귀국을 중지하였는데 장차 해당 폭도들을 대토벌하고자 함이라더라.
‘대토벌한다네’, 대한매일신보, 1909.11.02. 대토벌한다네. 일본군사령관 대구보는 이번 일본 대연습에 참여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가려하다가 이원정거장을 의병이 습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에 가려던 것을 중지하고 크게 토벌하기를 시작한다는 말이 있다더라.1) 신문아카이브, 황성신문. 1909.10.31. 2면2) 신문아카이브, 대한매일신보. 1909.10.31. 2면3)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統監府文書 9권 一○. 南韓大討伐實施計劃其他 (3) 南韓의 폭도 대토벌 실시 보고 한국신문아카이브, 황성신문.190911.02 한국신문아카이브, 대한매일신보.1909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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