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누가나 잘못을 한다. 그렇지만 잘못을 감추고 큰소리로 역정을 내거나 심지어는 자신의 잘못을 상대방에게 돌리는 무례함도 있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교만한 사람들이고 고집이 센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사과를 하지 않고 변명만 늘어놓은 사람은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과 함께 살아가면 피곤하다.
또한 어떤 경우에는 안 하느니만 못한 사과도 있다. 어설픈 사과로 오히려 문제를 더 키우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2020년 5월 코로나 방역 수칙을 어기고 술 파티를 벌였다는 증거가 잇달아 나오자 당시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많이 후회합니다. 전 그저 직원들을 격려하는 업무 행사라고 여겼습니다”머리를 조아렸다. 하지만 민심을 돌이키기엔 애석하게도 사과가 어설펐다. 직원들과 술 마신 것을 깨끗이 인정했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업무인 줄 알았다’는 해명에 여론은 싸늘했다. 야당은 “국민을 바보로 아느냐”고 했고 ‘총리는 사임하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이렇듯 서툰 사과는 불붙은 사태에 기름을 끼얹은 것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뼛속 깊은 사과는 반면 얼어붙은 마음을 움직인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물러난 뒤 국민 비호감으로 찍혀 은둔했다. 이후 한 언론과의 TV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친구들과 조국을 실망시켰습니다. 무엇보다 국민을 실망시켰습니다” 닉슨 대통령의 사과는 투박했지만 절절했다. 그러자 영국 인디펜던트지는 “그에겐 미국 사회에서의 점진적 재활을 가능케 해준 고백이었고, 미국인들은 이 말로 그를 ‘용서하고’ 보낼 수 있었다”고 했다.
이렇듯 사과(謝過)도 기술이다. 제대로 된 사과는 위기를 기회로 바꾼다. 심리 치료사 가이 윈치는 사과를 두고 ‘죄책감의 해독제’와도 같다고 했다. “사람들이 서로 사과하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이 고통스러울 뿐 아니라 생존에 필요한 관계가 악화될 수 있어서다” 거꾸로 해석하면 사람들이 사과를 받아들이는 것도 결국 ‘그래야만 살 수 있어서’라는 소리인 것이다. 누구나 결국엔 사과를 받아주고 싶어 한다. 그래야만 덜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다만 전제는 있다. 그 사과가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제대로 된 것일 때만 그렇다.
사과는 그래서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확실하고 구체적으로 말해야 한다. ‘유감이다’라는 말로 대충 넘기거나 ‘제가 ~한 것이 맞다면’ 식의 조건이 붙는다면 역시 제대로 된 사과일 순 없겠다. 그리고 나도 잘못이 있지만, 상대방에게도 있다라는 식의 사과도 안 한만 못한 사과가 되고 나는 것이다.
직업군 가운데 정치인들의 신뢰가 다른 직업군보다 가장 낮다고 한다. 왜냐하면 제대로 사과하는 모습을 보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언제쯤 우리는 정치인들의 온전한 사과를 들을 수 있을까 싶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부인 로라 부시 여사는 자신이 17세에 실수로 낸 자동차 사고로 친한 친구가 숨진 것을 자신이 쓴 책에서 고백했다. 그녀는 “그 일은 내 몸에 난 큰 상처와 같고 평생 짊어지고 살아가야 할 죄책감”이라고 했다. 전 세계 최대 도서 리뷰 업체 굿리즈는 이 책에 상(賞)을 수여하며 이렇게 밝혔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 영부인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좋은 사람이란 그럼에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용기를 통해 완성된다는 것을 로라부시 여사가 보여준 것이다”
사랑을 하려고 하면 용기가 필요하듯, 사과도 용기가 필요한 마음과 행동이다. 사과는 말과 함께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행동은 마음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 잘못했다’고 진심으로 말하는 용기를 낼 수 있다면, 그 짧지만 뜨거운 말이 얼어붙은 냉랭함을 녹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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