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은 군대해산 이후 덕유산을 근거지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대항하여 대활약을 펼치다 순국한 의병대장 문태서 장군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용맹한 기상을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문태서 의병장 추모사당에서 추모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 주간함양은 전진석 3·1운동 함양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의 <‘덕유산 호랑이’ 문태서 장군 부활을 꿈꾸며>를 30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문태서 의병대장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고귀한 희생정신의 뜻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편집자 주> 1907년 하반기에 벌인 의병활동들1907년 7월 대한제국군을 강제로 해산한 일본은 군대해산 과정에서 일어난 대한제국 군인들과 의병들의 저항을 ‘폭도봉기의 건’이라는 비밀문서로 만들었다. 이 기록에서 ‘경상북도(경상남도 오기?) 함양(咸陽) 진위대는 26일 오후 2시 무사히 해산했다.’라고 적고 있다.1) 대한제국 말기 함양군은 경남에서도 큰 지역이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함양에도 대한제국 군대인 ‘함양진위대’가 있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함양진위대는 진주진위대보다 먼저 해산당했음을 같은 자료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덕유산을 근거지로 하는 문태서와 그의 의병부대들이 벌이는 의병전쟁이 시작되었다. 의병전쟁과 관련된 ‘문태서’라는 이름이 공식적인 문건에 처음 등장한 시기2)는 문태서 의병부대에서 활동하다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독립유공자 박순용과 한진수 등의 판결문이다.3)4) 동 기록에 의하면 박순용(朴順用)은 1907년 음력 7월 14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 문태서의 지휘하에 약 1백 40~50명과 함께 총 및 칼을 휴대하고 전라북도 금산·무주·용담(龍潭)·장수(長水)·진안(鎭安)·운봉(雲峰)·진산(珍山)·고산(高山)·전주(全州)·임실(任實) 등지의 각 군내 및 경상남도 안의(安義)·함양(咸陽) 군내를 돌면서 의병활동에 필요한 군자금과, 군수품 등을 모집하고 의병에 참여할 우국지사들을 규합하였다. 역시 같은 기록에 의하면 한진수(韓鎭壽)도 10월 하순부터 연말까지 같은 활동에 가담하였다. 박순용과 한진수를 비롯한 1907년 의병활동에 관여한 문태서 의병부대 가담자들이 재판에서 문태서의 지휘 하에 벌인 군수품, 군자금, 의병모집 활동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밝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07년 음력 8월 중에 문태서(文泰西)를 지도자로 하여 약 1백 50여 명이 부대를 이루어 군자금 및 군수품 확보를 목적으로 하여 금산군 금산 읍내를 습격하고 우편취급소, 재무서 각 1동(一棟), 재류 일본인 민가(民家) 5동, 한인 가옥 4동에 방화(放火)하여 불태우고, 재류 일본인 대석(大石로꾸)·일목(一木요시)·조천(潮川시즈에)의 3명을 참살하고, 충(冲시모)·충(冲시즈에)·조천(潮川其木)·대석(大石가쓰네)의 4명을 부상시키고 성명 미상의 민가(民家)로부터 무명베 2필, 마포(麻布) 1필, 명주 1필을 확보함. ▷1907년 음력 9월 15일에 그 부하 10명과 함께 총을 휴대하고 전라북도 장수 중반암면(中磻岩面) 지지동(知止洞) 주막업(酒幕業) 배응원(裵應元) 가택에 돌입하여 총(銃)을 내라는 취지로 동 가인(家人)을 협박하고, 집안을 수색하였으나 총을 발견하지 못함. ▷1907년 음력 동월 23일 동도 동군 동면 상동(上洞) 성명미상(未詳)의 주막(酒幕)에 돌입하고, 동류(同類) 10명과 함께 동일한 병기(兵器)로써 동일한 수단으로 총을 강청(强請)하였으나 이것을 발견하지 못함. ▷1907년 음력 10월 하순 전라북도 무주군 횡천면(橫川面) 와석리(臥石里) 거주 김도안(金道安) 가택에 돌입하여 총기로 김도안을 협박하면서 ‘우리는 의병(義兵)인 바 군수금(軍需金)을 차출하라’고 하여 엽전 1백 냥을 확보. ▷1907년 음력 11월 중순 무주군 상곡면(裳谷面) 상조리(上鳥里) 최(崔) 모(某)의 가택에 돌입하여 위와 동일한 수단으로 엽전 1백 50냥 확보. ▷1907년 음력 동월 경상남도 안의군 북상면(北上面) 황산리(黃山里) 김(金) 모(某)의 가택에 돌입하여 동일한 수단으로 3백 냥 확보. ▷1907년 음력 동월 무주군 상곡면(裳谷面) 괴목리(槐木里) 김재봉(金在奉) 가택에 돌입하여 동일한 수단으로 군량미 벼 1백 석 확보. ▷1907년 음력 12월 안의군 북상면(北上面) 사양동(沙陽洞) 정(鄭) 모(某)의 가택에 돌입하여 동일한 수단으로 지폐 1백 20원 확보. ▷1907년 동월 중순 경 일자미상(日字未詳)에 전라북도 용담군(龍潭郡) 면명미상(面名未詳)의 금곡리(金谷里) 김(金) 모(某)의 가택에 돌입하여 동일한 수단으로 엽전 1백 냥 확보. ▷1907년 동월 일자미상(日字未詳)에 동군 이안면(二安面) 사전리(沙田里) 김모(金某) 가택에서 동일한 수단으로 엽전 80냥 확보.5) 1907년 12월에서 1908년 2월 사이의 의병활동이 문태서가 직접 지휘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지난 8회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기간은 이인영을 중심으로 하는 ‘13도 창의군 서울진공작전’이 펼쳐진 시간이었다. 그리고 문태서는 ‘호남의병대장’이라는 직함으로 서울진공작전에 참가하고 있음을 여러 가지 자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문태서가 의병들을 이끌고 서울로 향했는지 여부도 논란이 있으며, 이 논란은 위에서 적고 있는 활동이 문태서가 직접 지휘를 한 활동인지 아니면 관련있는 의병부대가 독자적으로 벌인 활동인지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판결문을 인용하고 있는 것은 기록에 해당 의병들이 문태서부대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문태서가 ‘13도 창의군 서울진공작전’을 위해 소총부대를 이끌고 서울로 향했더라도 근거지인 덕유산 주변에서는 군자금과 군수품 확보 노력이 진행되었을 것이다. 지난 가을 추수로 인해 해당지역 민가에는 상당량을 양곡이 비축되어 있었을 것이며, 문태서는 의병들이 군수품 및 군자금 확보가 용이하도록, 지역에서 곡물이 외부로 매각되는 것을 막고 있었으며, 곡물을 현금으로 바꾸어 세금을 징수는 친일파 징세원들에 대해 가차없이 처단하고 있었다.6) 위의 기록을 분석해보면 1907년 하반기에 문태서가 벌인 의병활동은 군자금 모금, 군수품 확보, 총기 수집이 주요한 활동이었다. 이는 당시에 의병을 일으켰던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거쳤던 과정과 비슷하다. 다만 의병전쟁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려고 했던 대상이 이전의 의병지도자들은 지역의 권문세가나 지주 등이었던 것에 비해 문태서는 해당 지역의 친일 매국노를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문태서는 대중 속으로 슴어 들지 않으면 일본군경을 대상으로 지속적으로 전투를 벌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진즉에 자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제국주의의 앞잡이가 되어 우리나라 백성들을 약탈하는 앞잡이가 되어 부를 축척해 나가고 있던 일진회 회원, 조세징수원, 행정직원 등을 주된 강탈의 대상으로 삼았다.   1) 한국 주차군사령관, 참1발 제84호 명치 40년 8월 28일 오후 1시 50분발 오후 4시 50분착2) 문태서가 공식문건에 나타난 시기와 공식문건에 등장한 시기는 확실하게 다른 의미를 가진다. 공식적인 문건에 나타났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공식기록을 위해 이름이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하며, 공식문건에 등장했다는 것은 본인이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3) 한국사데이터베이스, 『朴順用 판결문』, 독립운동사자료집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 의병항쟁재판기록, 판결 명치 43년 공(公) 제177호4) 한국사데이터베이스, 『韓鎭壽 판결문』, 독립운동사자료집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 의병항쟁재판기록, 판결 명치 43년 공(公) 제25호5) 일제는 1907년 9월 6일 ‘총포 및 화약단속법’을 공포하였다. 총포 화약류를 운반, 소유할 때는 관할 경찰관서의 인허가를 받아야 했다. 또 특정 지역은 총기 화약류의 수수, 소유를 금지할 수 있었다. 이 법에 따라 민간인 소유의 무기류에 대한 일제 단속이 행해졌다. 압수당한 무기 가운데 9만5981점(73.6%)이 화승총이나 칼·창류인 구식무기이고 3766점(26.4%)이 신식 소총 및 대소포인데, 이 가운데서 87%를 차지하는 3144점(약식총과 피스톨)이 함흥 관내에서 압수되었다. 이 결과 총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포수들이 의병에 참여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또 의병의 무장은 자연스럽게 화승총이 아닌 양총으로 바뀌었다. 군대 해산으로 양총을 소지한 의병이 증가하였다. 양총은 인천항이나 부산항을 통한 밀수나 서양 선교사를 통해 사들였다. 1908년 1월 한 미국인이 모젤총 2만5000정과 탄약을 의병들에게 공급할 목적으로 상해 방면에서 한국에 밀수입하려 하였다. 무기 밀매는 미국인, 청국인, 일본인까지 가세하였다. 청국인들이 한국 의병들에게 1909년 12월 밀매한 가격은 서양식 총 1정에 최상품은 100원, 중품은 70원, 하품은 50원이었다. 화약 한 근에 5원~7원을, 탄환 백발에 5원~10원을 지불하였다. 당시 1원은 10냥 1냥은 10전이었다. 의병부대는 다양한 총기를 가졌지만, 정확도와 효용성, 그리고 탄약의 문제 등으로 훈련된 일본군 토벌대를 이길 수 없었다. 화승총을 개조하든가, 양총(洋銃)을 구매하든가 하여 신식 총으로 무장해서 승리하는 것이 의병들의 소망이며 집념이었다. 그래서 의병들은 양총 확보를 위해 군자금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으며, 총기구입을 위해 다양한 루트를 확보하고자 하였다.6)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자료 9, 의병편Ⅱ (三) 三月, 慶尙道 步兵第一二旅團司令部守發 第八三號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댓글0
로그인후 이용가능합니다.
0/150
등록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이름 *
비밀번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복구할 수 없습니다을 통해
삭제하시겠습니까?
비밀번호 *
  • 추천순
  • 최신순
  • 과거순